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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Sep 15. 2016

로맨틱한 파리

오랜 전 세계일주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가고 싶은 나라와 하고 싶은 일을 적어둔 노트엔 파리도 있었다. 파리에서 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서 책 사기’였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은 영화 <비포 선셋>에서 두 주인공이 조우하는 장소로 나와 유명세를 탔다. 영화에 나와 관심을 갖게 됐지만 이 서점의 역사를 찾아본 뒤 이 곳을 가고 싶어 더 안달하게 됐다. 서점 주인은 가난한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해 서점 한 켠을 내어줬다고 한다. 머무는 조건은 서점 일 하루 2시간 돕기, 하루에 책 한 권 읽기, 한 장짜리 자서전 쓰기였다. 서점에는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이들을 냉대하지 말라.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이 서점의 정체성을 요약한 말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어둠이 내려 앉은 고요한 밤. 작가 지망생들은 언젠가 저 서가에 자신의 책이 꽂히길 기대하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글을 쓰고 고치고 또 쓰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내가 오른 계단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누군가가 기뻐하며 뛰어올라갔던 계단일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던 2층 바닥은 누군가 글이 풀리지 않아 밤새 서성거렸던 곳일지도. 어쩌면 서점 빼곡한 서가 어딘가에 그들의 책이 꽂혀있을지도 모른다. 


서점 안에선 사진 촬영 금지라 사진은 찍지 못했다. 대신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준비해온 엽서를 썼다. 며칠 간 보고 느낀 것들을 한 자 한 자 눌러 담았다. 자리를 옮겨 타자기가 놓인 공간에 내 흔적도 남기고 왔다. 다시 가서 확인할 날이 올지 그때까지 남아있긴 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The Reader'를 집어왔다. 영문학 책을 사고 싶었는데 결국 번역본을 사서 아쉽지만 책 앞장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도장은 잊지 않고 받아왔다.  


한국에선 스토리를 가진 서점들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가엔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서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동네 서점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엔 어릴 땐 두 세개 서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최근까지 영업을 한 곳은 4년 전에 사라졌다. 어느 날 집 앞 서점이 셔터를 내리고 공사하는 모습을 보고 가까이 가보니 '리모델링 후 새로 문을 열겠다'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엔 카페 겸 빵집이 들어섰다. 언제부턴가 서점 대신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서점을 애용해왔기에 사실 서점이 없어져도 불편함은 없지마 추억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파리를 ‘로맨틱한 도시’로 기억하게 한 건 <미드나잇 인 파리>였다.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파리에 가면 없던 예술혼도 깨어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만 걸어도 아이디어가 샘솟고 문장들이 술술 풀릴 것 같았다. 특히 내가 ‘경성’이라는 공간을 동경하는 것처럼 그도 1920년대 파리를 동경했기에 더 감정이입이 됐다. 


생에티엔뒤몽 성당





얼마 전까지 <퐁네프의 연인들>을 로맨틱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재개봉 때 영화관에서 다시 보면서 '이런 내용이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영화 내용은 ‘노숙자 커플의 공사 중인 퐁네프 점령기’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어수선한 다리와 걸인으로 나오는 남녀 주인공의 행색은 도무지 아름다운 파리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남녀 주인공의 마음을 포장 없이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데는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 영화로 기억 속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두 주인공의 거처가 되었던 다리. 물론 영화는 재현된 세트에서 촬영됐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자물쇠들. 사랑의 맹세가 차고 넘쳐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다. 



 


파리에 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언제 어디서나 털썩 앉아 책을 읽거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른 아침 마레 지구 산책을 나섰다 들어간 작은 공원에선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공원엔 새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다른 공원에서도 음식을 먹거나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생마르탱 운하 주변엔 와인이나 맥주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을 많았다. 


생마르탱 운하
생마르탱 운하



빵을 먹으러 들어간 공원에서 독서하는 사람들 때문에 괜히 위축됐다. 독서실에서 몰래 과자 먹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평화로움을 넘어 소리내면 안 될 것 같은 숙연함마저 느껴졌다.


단 일분도 서있을 수 없었던 땡볕 아래 앉아 있던 사람들.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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