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ak Oct 11. 2016

Remember the water

스마트폰이 사라진 열흘

한국에선 늘 휴대전화가 손에 들려있었다. 반지를 손가락이 끼우고 팔찌를 팔목에 채우는 것처럼 휴대전화의 자리가 그곳이었다. 급한 연락이 올 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늘 그랬다. 쉴 새 없이 누군가와 카톡을 했고 메일을 확인했다. 일분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도 실시간으로 읽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찰나에도 눈은 항상 휴대전화를 향해있었다. 


더블린에서 휴대전화의 자리는 가방이었다. 학원에 간 첫날 어학원 가이드가 함께 시내를 돌며 내 손에 휴대전화를 보더니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다니지 말라”라고 주의를 줬다. 자전거를 탄 애들이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를 낚아채 도망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카페에서도 절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후 길에서 휴대전화를 쓸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길도 찾아야 하고 모르는 단어도 검색해야 하는 초행자라 전화를 손에서 뗄 수 없기에 더 휴대전화를 더 꼭 쥐고 다녔다. 


걱정해야 할 건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이었다. 평소처럼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며 휴대전화로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입을 헹구기 위해 선반에 휴대전화를 두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휴대전화가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었지만 휴대전화에 닿지 않았다. 휴대전화 액정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액정엔 초록색 한 줄만이 깜빡거렸다. 현실을 부정하며 전원 버튼을 계속 껐다 켰다 하는 사이 그 한 줄 마저도 보이지 않게 됐다. 그렇게 휴대전화가 사라졌다. 


휴대전화 수리점 여러 곳을 돌았다. 가장 싼 곳의 수리비가 180유로. 주변에 물어보니 사설 대리점에서 고칠 경우 부품을 바꿔 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대리점과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새 제품을 사는 것과 중고를 구매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을 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출혈에 헛웃음만 나올 뿐 선뜻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남은 약정기간은 속을 더 쓰리게 했다. 수소문 끝에 동생이 공기계를 구했고, 추석 연휴에 런던에 오는 친구 편에 내게 전달하기로 했다. 대신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휴대전화 없는 삶을 살게 됐다. 


전화가 사라진 첫날. 잠을 자야 하는데 알람시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상가상 다음날엔 새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돼있었다. 아침 일찍 여행을 떠나는 집주인을 만나 열쇠를 받아야 했다. 궁리 끝에 노트북 알람 기능을 생각해냈다. 덕분에 아침에 늦지 않게 일어나 새 집으로 향했다. 


손엔 휴대전화 대신 지도와 수첩이 들렸다. 손목엔 시계가 자리했다. 평소 챙기지 않던 것들이라 꼭 하나씩 빼먹고 나왔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시계에 신경 쓰면 지도를 까먹고, 지도를 챙기면 시계를 두고 나오는 식이었다. 새 집으로 이사온 터라 길이 낯설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지도를 펴 길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지도를 들고 서 있으면 사람들이 흘끔흘끔 바라보다 “너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럴 땐 때를 놓치지 않고 도움을 청했다. 때로 길을 알 것 같아 괜찮다고 해도 “진짜 괜찮아?”라며 다가왔다. 


어느 날 도로 건너편에 사는 이웃 아저씨를 만났다. 역시나 방향이 헷갈렸다. 헤매다간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바로 지도를 들고 다가가 "여기 가려고 하는데 이 방향으로 가면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나도 그쪽으로 가니 같이 가면서 알려줄게”라며 앞장섰다. 함께 걸으며 그는 “이 길로 쭉 가다가 운하가 나오면 우회전하면 돼”라는 말을 서너 번 반복했다. 불안했는지 “집에 올 땐 저 물 있지? 운하만 생각하고 오면 돼. 그러면 집에 쉽게 찾아올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어딜 가든 늘 집에 올 땐 운하 방향을 생각했다. 운하를 따라 걷가 집 근처에 있는 빨간 다리가 보이면 안심이 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역시 지도를 들고 다는 데 금방 익숙해졌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을 수 있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고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을 거리의 이름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휴대전화가 돌아온 뒤 바로 구글맵으로 돌아섰지만 GPS만 믿고 생각 없이 걷다 방향을 못 잡아 계속 같은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거나 구글맵을 따라 으슥한 골목길이나 기차역 뒷문으로 가게 될 때면 다시 지도를 꺼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오는 날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3fe 커피를 마시러 나섰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걸어왔던 길을 펜으로 이어봤다. 지도 위로 지나쳤던 풍경들이 그려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아일랜드냐' 묻는 말들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