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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Oct 14. 2016

더블린 근교, 말라하이드 캐슬

수업이 없는 월요일

학생일 땐 간혹 찾아오는 ‘학원 수업 없는 날’이 선물같았다. 시험기간이 끝난 직후 그리고 하루 이틀 주어지는 학원 방학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몰래 빠지는 건 불가했다. 뒷일을 생각하면 놀더라도 학원에서 노는 것이 마음 편했다.) 엄마는 학원을 빠지게 되면 “학원비가 얼만데”라며 혀를 찼지만 나는 뒤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학생에겐 돈보단 해방이 더 중요했다.


내 돈을 내고 다니게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난해부터 토요일 오전에 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수강료는 한 달 4번 수업에 약 12만 원. 한 번에 3시간 수업이니 1시간에 1만 원인 셈이었다. 6개월 학원을 다니는 동안 주말 출근 때문에 못 간 한 번을 빼고 전부 출석했다. 자발적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보단 ‘1시간에 1만 원’이란 공식이 오전 10시 신촌 학원 교실로 날 이끌었다. 전날 친구들과 술을 새벽까지 마셔도, 12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도 꾸역꾸역 학원에 나갔다. 숙취에 헤매며 책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만 가득 채워놓더라도 학원에 나갔다는 사실이 날 뿌듯하게 했다. (교실도 좁은데 몇 번 수업시간에 술 냄새를 풍기며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날 얼마나 욕했을까)


더블린에서 다시 학생이 되었다. 수업 없는 날은 도로 즐거운 날이 됐다. 학원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파업 때문에 학원이 이틀 동안 방학을 했다. 그리고 또 얼마 뒤 학원 강사들 워크숍 때문에 월요일에 오후반은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공지가 전해졌다. 예전이었으면 “돈 아깝다”고 구시렁댔겠지만 득달같이 어딜 갈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월요일. 더블린 시내에서 다트로 20여분 걸리는 말라하이드에 가기로 했다. 탈봇 가문(Talbot Family)이 약 800년간 살았던 말라하이드 성과 정원 그리고 바닷가가 있는 곳이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온다고 했지만 “더블린에선 비 온다고 집에 있으면 아무 데도 못 가”란 학원 친구 말을 떠올리며 일단 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성이 아담하고 자그마했다. 이곳은 1174년 영국 헨리 2세가 아일랜드에 올 때 함께 온 기사 리차드 탈봇에게 하사한 곳이다. 처음엔 지금보다 더 작은 건물이었는데 세대를 거치면서 증축됐다. 내부에 들어가보면 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생활 공간이었던 만큼 오랜 기간 수집한 예술작품들과 가구, 아기자기한 소품도 가득했다.


마지막 거주자는 로즈 여사다. 1970년대 상속 문제로 성을 아일랜드 정부에 팔고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물론 관람객들이 둘러본 방에선 아니고 현대식으로 꾸며진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말라하이드 캐슬




투어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다 독특한 손잡이에 걸음을 멈췄다. 그때 옆에 서있던 투어 가이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 뒤에서 내려오는 나이지긋한 두 여성들에게 "100년 넘은 손잡이에요. 혹 손이 미끄러지더라도 쭉 미끄러져내리지 않게 중간 중간 장식이 있어요. 손잡이 잡고 내려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투어 내내 마치 자기 집을 자랑하듯 유쾌하고 명쾌하게 성 구석구석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배웅하듯 마지막 관람객이 나갈 때까지 지켜보며 인사을 건네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입을 크게 벌려 또박또박 말하던 모습, 사람들의 모든 질문을 귀기울여 듣고 진심을 담아 대답해주던 모습 그리고 얼굴 주름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활짝 웃던 모습이 당분간 기억날 것 같다.


말라하이드 성의 정원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피크닉 분위기를 내려 도시락을 싸갔는데  괜히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혼자라서 그랬나.



말라하이드는 바닷가 마을이다. 더블린 부자들은 대개 시티에 살지 않고 호스나 말라하이드, 블랙락 등 교외 지역에 산다고 한다. 더블린이 워낙 작아서 교외지역이라고 해봤자 차로 30여분 남짓 떨어진 곳들이다. 바닷가엔 요트들이 금방이라도 떠날듯 줄지어 있었다. 하늘엔 구름이 마리에 닿을 듯 낮게 지나가고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다. 바람은 적당히 서늘하게 불어왔다. 고요한 풍경에 소란했던 마음이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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