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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Oct 30. 2016

그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테이트모던에 가기 위해 밀레니엄 브릿지를 건너고 있었다. 가까이에선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세인트폴 성당의 웅장한 자태가 뒤로 펼쳐지고, 앞엔 화력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이 나타났다. 발 아래 흐르는 템즈강,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타워 브릿지 그리고 더 샤드 등 주위 모든 것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존재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보다도 오랫동안 이름으로만 익숙했던 것들이 눈 앞에 펼쳐져있단 사실에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테이트모던으로 다가갈수록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Korean'이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옷매무시를 고치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얼굴도 점검했다. 혹 행동 가운데 실수한 게 있는 건 아닌지 머리를 굴렸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템즈강에 떠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한글이 가득 적힌 작품이었다.  


몇 걸음 더 다가가자 한글로 뒤덮힌 정육면체 위에 노란 옷을 입고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형 발 아래 글들이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물 위에 떠 있는 노란색을 보는 것 만으로 '세월호'가 생각났다. 2년 여 전 전국을 물들였던 노란 리본이, 아직도 광화문 광장 한켠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직 세월호에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템즈강에 이런 작품을 설치한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아무런 소식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 모든 국민들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던 것처럼 또다시 미안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다리 난간에 바짝 붙어서 아래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어떤 내용인지는 여전히 보이질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겁색해보려 했지만 느린 인터넷은 갑갑함만 더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섰다. 그는 "템즈강 아름답지?"라고 말을 건넸다. 이어 여행온건지, 런던에 얼마나 있을 예정인지, 런던에선 뭘했는지, 앞으로 뭘 할 예정인지 질문을 늘어놓았다. 마음을 다른 데 빼앗기기도 했고, 서양남자가 동양여자에 대해 갖는 편견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답을 하다 테이트모던이 문을 닫기 전에 가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자리를 떴다. 


그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한국어로 적힌 작품을 보다 내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영어가 완벽하진 않지만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말해줄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외부자의 시선으로 본 세월호 사고는 어떤 모습인지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희생자들을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더 남길 수 있진 않았을까. 




강을 건너 테이트모던으로 들어가기 전, 작품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 세월호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한국 전쟁 후 분단으로 잃어버린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모은 작품이었다. 반 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하지만 어느새 내게 비극의 대명사는 '세월호'가 된 모양이다. 그저 노란색을 본 것만으로 4월 16일을 떠올리는 나를 보며, 사고와 이후 벌어진 일들이 내게 아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 세월호 사고는 내게 (혹은 우리 세대에게) 간접적이면서도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사고의 처음부터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생환 소식을 한없이 기다렸다. 이후 참사가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닌 온갖 사회 부조리와 정부의 무능(국민을 보호해줄 수 없는 국가라니)이 빚어낸 인재란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참담함이 극에 달했다. 모두들 한국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벌써 시들해진 듯하다. 너무나 많은, 다른 의미로 참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테지만. 사고 후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비슷한 유형의 사고들이 다시 언급되며 달라지지 않은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20년 뒤 또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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