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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Nov 09. 2016

학교 가는 길

2016년의 더블린

딸깍, 쾅, 덜컥 덜컥


방을 나와 현관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가 집 문을 닫는다. 50년이 넘었다는 우리집은 도어록 대신 열쇠를 사용한다. 나를 포함해 4명이 함께 사는 집 문을 열쇠로 잠그고 나면 다른 집들과 함께 쓰는 문이 하나 더 나온다. 이 문은 닫으면 저절로 잠기는데 가끔 꽉 닫지 않아 열려 있을 때가 있다. 쾅 소리가 나게 닫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언제나 문고리를 잡고 두세 번 당겨 확인을 한다. (훔쳐갈 건 없지만) 경보장치 하나 없는 곳에 사는 이가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안책이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가면 존재감을 잃은 '블랙버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티센터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핫 플레이스'로 알려져 있어 평일에도 저녁이면 사람들도 북적인다. 곳곳에 사람들이 두고 간 맥주잔만이 전날의 소란함을 증명한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자전거, 자동차들은 대부분 시티센터를 향해 움직인다. 더블린 자전거족들은 대부분 헬멧을 쓰고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자전거가 인도를 침범하지 않는다. '코카콜라 제로' 광고를 단 시티바이크를 탄 사람도 많다. 시티 곳곳에 정류소가 있어 편하게 타고 반납할 수 있다. 한번 에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30분으로 한정돼있지만 도시가 작기 때문에 충분하다. 1년 이용요금은 20유로로 버스나 루아스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세워두고 도둑맞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역시 장점이다.


 



백조가 사는 운하


일사분란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운하가 나온다. 지금 사는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여길보곤 집을 둘러보기도 전에 라스마인(Rathmines)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블린에 도착해 약 2주간 시티센터에 머물면서 서울과 다름없이 삶에 실망하던 차였다. 운하가 흐르는 이곳에서라면 휴식을 즐기겠다는 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호수인 줄 알았는데 지도를 보니 운하였다. 리피강처럼 좌우로 뻗어있어 운하를 따라 산책하기 좋다) 이전에 내가 살던 방에 있던 언니가 좀 더 추워지면 백조도 나타날 거라고 귀띔했었는데, 차가워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자 백조들이 운하에 유유히 떠다니기 시작했다. 도심에 백조가 있다는 게 신기해 매일 오기는 길인데도 매번 백조들을 (무서워하면서도) 쫓아다닌다.  


노란 더블린 버스가 운하의 빨간 다리를 지나가고 있다. 
멀리서 볼 땐 '우와'하면서 다가가지만, 가까이 가면 온갖 새의 배설물 때문에 발 밑을 조심하게 된다. 



다리를 건너면 스포츠 경기가 열릴 때마다 떠들썩해지는 펍이 있다. '기네스 4유로'라고 적혀있지만 아직 가보진 못했다. 눈여겨두기만 하고 못 가보긴 Wall&Keogh란 티 라운지도 마찬가지다. 집에 있다 나오긴 멀고, 집에 가는 길에 부러 들르긴 시간이 애매할 때가 대부분이라 볼 때마다 '한 번 가야 하는데'를 되뇌고 있다. 다 쓰러져가는 듯 보이는데 늘 사람들이 많아 궁금했던 The Bernard Shaw는 한참 동안 이름을 몰랐다. 한참 지나 평소와 다르게 건너편 길로 걷다 간판을 보고서야 이름을 알게 됐다. 이탈리아어가 오가는 식당이었는데 직원들이 친절하고 활기 넘쳐 책을 읽는 덴 적합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다. 직원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게 안을 돌아다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었다. 


가는 길 양 옆 벽은 은근 쏠쏠한 공연 정보를 제공한다. 바꾸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주의를 기울여보면 어느새 바뀌어 있다.   





눈치게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긴장해야


더블린에서 길을 건너는 건 '눈치게임'같다. 신호등은 있지만 파란불을 기다렸다 건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자동차 신호등을 보고 차가 오지 않으면 그냥 건넌다. 2차선 도로 정도라면 그럴 법하지만 6차선 이상 도로에서도 사람들은 거침이 없다. 처음엔 차선 방향이 한국과 반대라 헷갈리고 (한국인이 많다지만) 눈에 띄는 동양인이라 행동이 조심스러워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하면 그제야 따라 갔다. 이젠 익숙해져 먼저 치고 나간다. 한번 방심하고 가다 마주오던 버스가 거세게 경적을 울려 크게 놀란 뒤로 몇 번 얌전히 신호를 기다렸지만, 어느새 다시 무법자가 됐다. 




계속 길을 따라 걸으면 왼쪽으로 카사블랑카,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등의 상호를 단 가게들이 이어진다. 오른쪽엔 할랄푸드를 파는 가게들도 있다. 근처에 유대인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이 유대인 집단 거주지인 듯하다. Bleeding Horse 펍을 지나가면 Camden Street가 나온다. 길 이름을 기억하는 데 취약한 편인데 오른쪽엔 Camden Hotel이, 왼쪽엔 Camden Hostel이 있어 오갈 때마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됐다.


Tesco express 앞엔 늘 한 남자가 인썸니아 종이컵 하나를 들고 앉아 있다. 그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인데 구걸엔 관심이 없다는 듯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꺼운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아침 식사를 대신해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들고 나오던 사람들은 문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주곤 한다. 예전엔 이 앞을 지날 때 "동전 좀 달라"라고 외치곤 했는데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려 노력하는, 절대 돈을 주지 않을 동양인 여자라고 인지하고 포기한건지 아니면 구걸하는 사람이 바뀐 건지 모르겠다. 시티센터로 가까워질수록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간격이 짧아진다. 


아일랜드의 골칫거리는 하나 더 있다. 도박. 이곳에선 도박이 합법이다. 복권에 당첨됐을 때도 세금을 떼지 않는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25분 남짓 길에 Gold Rush 카지노와 Boyle Sports란 스포츠 토토와 비슷한 내기에 돈을 걸 수 있는 곳이 있다. Paddy Power 역시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박공간이다. 도박은 돈세탁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세금도 없고 추적도 안 되기 때문에 승률을 조작해 검은돈이 도박에서 딴 돈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겠지


Camden Street에서 Fresh를 끼고 오른쪽 골목길로 빠지면 Montague Street가 나온다. 짧은 길에 버거집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Green Bench Coffee엔 늘 줄이 길다. 잠시 오후반에 다닐 때 12시 반쯤 이 가게 앞을 지나갔는데 가게 안에 두세 겹을 싼 줄도 모자라 바깥까지 사람들이 줄을 늘어선 것을 보고 무엇이 인기 비결인지 늘 궁금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이미 가게 문을 닫아 (4시면 닫는다) 맛보지 못하다가 런던 여행에서 새벽 비행기로 돌아오는 길에 줄이 없길래 커피와 머핀을 먹어봤다. 아직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도 출근길에 빵과 음료를 사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 여자가 양 손에 커피를 하나씩 들고 가게를 나선다. 허리 라인이 잘록 들어가게 벨트를 맨 검은색 단정한 코드에 무릎까지 오는 회색 정장 치마를 입었다. 계절에 맞게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고 4~5cm 정도 되어 보이는 검정 구두까지 갖췄다. 나오자마자 익숙한 듯 4차선 도로를 여유 있게 걸어간다. 마치 그녀가 지나가면 차들이 다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듯. 그러더니 거침없이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쏙 들어간다. 마침 나오던 남자가 손이 없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줬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 이내 거리는 어디든 걸어갈 수 있도록 무장한 워킹화에 검은색 바지,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일찍부터 꺼내 입은 검은색 패딩이 보인다. 목에 칭칭 동여맨 목도리 때문에 고개가 더 숙여지지 않는다. 이날따라 침대에서 꼬물거리느라 씻는 대신 질끈 동여맨 머리가 괜히 신경 쓰인다. 


언제 한번 직원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St Stephen's Green 입구가 보이면 시계를 확인한다. 보통 8시 56분. 늦었을 땐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다. 수업이 9시에 시작하는데 9시 15분까지는 출석이 인정돼 보통 15분에 맞춰 다닌다. 공원을 지날 때 그날의 날씨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늦어도 날씨가 좋은 날엔 꼭 사진을 한 장씩 찍게 된다. 처음엔 공원 안에서도 많이 헤맸는데 이젠 가장 빠른 길을 터득해 사진만 찍고 재빠르게 공원을 빠져나간다. 공원에서 시티 쪽으로 나가는 길목에 울부짖듯 구걸하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요즘엔 자리를 옮기셔서 안 보이신다. 유독 그 길을 지나갈 때 죄책감이 들었는데 마음이 한결 가볍다. 


맑은 날의 공원
데이 투어 참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두르며 길을 걷가 놓칠 수 없는 장면서 시간을 지체했다. 지나가던 할머니는 "Beautiful day, isn't it?"하며 말을 건넸다. 


시티센터는 온통 공사 중이다. 루아스(지상철)를 연결하는 공사 때문에 어디서 찍어도 사진이 영 맘에 안 든다. 돌아가기 전에 끝났으면 좋겠다는 내 얘기에 누군가가 "2018년에 완공 예정"이라며 어림없는 소리라고 애기했다. 영화 <원스> 도입부에 주인공이 버스킹을 하며 모은 돈을 들고 도망간 남자를 쫓아 뛰어간 길이 Grafton Street, 거친 숨을 내쉬며 대화를 나누던 곳이 Stephen's Green 입구다. 시내 중심가인 Grafton Street엔 매일 버스킹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제 몇몇은 자주 봐서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버스킹 역시 젊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들 역시 다채롭다.   


학교는 번화가 바로 옆 Dawson Street에 있다. 9시 5분쯤 되면 학원 앞에 도착하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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