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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Nov 29. 2016

수요일 밤


화요일 저녁. 더블린 한 펍으로 세계 이곳 저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펍은 시끌벅쩍해졌다. 모두들 한 마디라도 더 영어를 하기위해 목소리를 키웠다.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데도 바짝 다가서 목청을 높여야 했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엑센트가 각기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줄래?"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테이블을 오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길 했지만 결국엔 어디서 왔는지, 왜 더블린을 선택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학교는 어딜 다니는지 등의 질문과 답만 이어졌다. 붙임성 있는 누군가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페이스북 계정을 교환하고 좀 더 심도깊은 이야기를 나눴을 지도 모른다. 다양한 친구를 만들기 위해 Language Exchange Meetup에 나갔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화젯거리를 고민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영어 문장들을 배열하고 상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건 내게 무리였다. 단순한 질문들의 나열에 지쳐 세 시간 만에 굴복하고 펍을 나섰다. 


귀는 여전히 먹먹했고 목은 따끔거렸다. 여러 나라 친구들을 사귀고 영어회화도 늘릴 수 있을 거라 한껏 기대를 한 자리였다. 학교가 끝나고 세 시간이나 기다려 나갔던 만큼 실망도 컸다. 따지고 보면 나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헛헛해졌다. 시간을 헛되지 흘려보내는 거 같아 조급증이 또 다시 삐쭉 올라왔다. 좀 더 적극적으로 무엇이든 해보자고 했던 다짐들이 본성에 굴복된 것만 같았다. 늘 오가는 거리인데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어둡고 조용하게 느껴졌다. 



더블린 카메라 클럽


'카메라 클럽, 비기너 코스 시작'


터덜터덜 걷다 '더블린 카메라 클럽' 앞에 붙어있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새로 이사온 이방인인 나는 길을 오갈 때마다 간판, 각 가게들이 파는 물건, 상점 유리에 붙은 메시지 등을 훑곤 했다. 평소 사진에 관심이 있었고 앞으로 여행을 하며 사진을 더 잘 찍고 싶었기에 안성맞춤인 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된다면 금상첨화. 


수업 등록까지 세 번의 제동이 걸렸다. 첫째, 이 단체가 믿을 만한 곳인가. 괜히 이상한 단체가 운영하는 곳에 들어갔다 돈만 난리고 최악의 경우 봉변을 당할 수 있겠단 생각에 일단 망설여졌다. 둘째, 100유로. 한국에서도 단기로 하는 수업들을 간간히 들었왔다. 그때 수업료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여기선 '안 벌고 적게 쓰기'를 실천하며 사는 중이다. '하루 10유로'를 기준으로 세워놓았기 때문에 100유로는 큰 돈이었다. 셋째, 알아 들을 수 있을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입문반이긴 했지만 '사진'이란 전문분야에 대한 강의였다.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친절한 답장이 도착했다. '한국 사람이 강의를 들은 적은 없지만 외국인들도 많이 듣고, 메일 보낸 걸로 봤을 땐 수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바로 등록버튼을 눌렀다. 






아마추어들의 열정으로 운영되는 클럽


수요일 밤이 되자 늘 셔터가 내려져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던 공간이 '카메라 클럽'으로 변신했다. 8시30분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늦은 밤 사진 수업을 듣기 위해 모여있었다. 중장년의 사람들도, 히잡을 쓴 이들도 브라질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 이상한 곳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카메라 클럽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수 십 년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임인 더블린 카메라 클럽의 멤버들이 매주 돌아가며 강의를 했다. 수업에선 사진 구도, 노출, 풍경사진 찍는 법, 흑백사진, 포토샵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 학교 다닐 때 사진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강사들은 매주 자신이 찍은 사진을 들고와 예로 들며 수업을 했다. 그들의 사진을 보며 '오토 모드'의 편리함과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장 때문에 포기해버린 '수동 모드'로 돌아가야겠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10주간 이어진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토요일 outing과 암실 수업이었다. 


기대했던 토요일 outing 오전 '더블린 답게' 비가 쏟아졌다. 클럽 담당자는 당일 아침 '지금 비가 쏟아붓고 있지만 10시 이후엔 소나기가 그칠 것으로 기대한다. 예보에 내기를 걸어보겠다. 아웃팅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단체 메일을 보냈다. 더블리너의 말을 신뢰하며 클럽으로 향했다. 선생님과 같은 카메라 기종을 쓰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였다. 실내에서 기본적인 설명을 하고 질문을 몇 가지 주고받다 밖으로 나가자 비가 말끔히 개있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선생님은 4명의 초보자들을 이끌고 익숙하게 더블린 곳곳을 누볐다. 다양한 장소,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초보자들이 노출과 초점을 잘 맞춰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여러 조언을 해줬다. 그라프튼 스트리트에선 스트리트 사진을 어려워하는 초보자들을 위해 '브라운 토마스 백화점' 도어맨을 즉석에서 섭외해 인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매혹적인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거리에서 탭댄스를 추자 그는 열정적인 사진작가로 변신했다. 우리들은 망부석처럼 제 자리에서 셔터를 누르는 데 그쳤지만 그는 자리를 옮기고 자세를 낮춰가며 사진을 찍었다. 댄서가 뛰어올라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이 완벽히 초점이 맞은 채로 그의 카메라에 담기자 그는 카메라를 들고와 어린 아이처럼 자랑했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가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기회를 보던 그는 결국 원하는 사진을 얻곤 우리에게 보여주며 카메라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게 바로 내가 찍고 싶었던 거야"라고 거듭 말했다. 



오랫동안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암실은 처음이었다. 필름으로 찍지만 매번 디지털 스캔을 하고 인화하고 싶을 때 역시 필름을 들고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디지털 인화를 해 가끔 '내가 진짜 필름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암실 수업은 더욱 기대됐다. 통에 감긴 필름을 풀고 틀에 끼우고 현미경처럼 생긴 기계에 원하는 사진을 올려놓고 배율을 조정한 뒤 빛을 쏘여 인화지에 입히고 세 단계에 거쳐 약품처리를 하고 나면 사진이 스윽 나타난다. 좀 더 밝거나 어둡게 하고 싶을 땐 포토샵 대신 필터나 다양한 크기의 검정색 종이와 흰색 종이가 이용된다. 눈 앞에서 강사가 사진이 나타나는 모습, 사진을 포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결과물을 비교할 수 있게 해줬다. 이런 과정을 생각하면 그냥 셔터를 눌러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잘 나온 사진이라고 자랑했던 게 왠지 겸연쩍어진다. 




비가 막 그친 공원 곳곳을 돌며 셔터스피드, 조리개, ISO 다루는 법을 연습했다. 
브라운 토마스 백화점 앞엔 늘 복장을 갖춰입은 직원이 서 있다. 그는 선생님의 부탁으로 outing 간 학생들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라프튼 스트리트엔 늘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리에 초점이 안 맞긴 했지만 이날 찍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수업날도 숀은 먼저 내 이름을 불러줬다. 처음 갔던 날 먼저 메일로 연락을 했던 덕에 (그리고 동양인은 나뿐이라) 그는 출석부를 체크하며 내가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내 이름을 말했다. 매 수업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겐 이름을 물었지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I know"라며 출석부에 표시를 했다. 이젠 그에게 이름을 들을리 없겠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가디건 차림이었는데 10주가 지나니 패딩에 머플러까지 두르고도 "춥다"를 반복하고 있다. 해도 짧아졌다. 일몰 시간이 당겨진 데다 썸머타임까지 끝나니 해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이젠 오후 4시 30분만 돼도 사방이 어둑하다. 그만큼 더블린에서 보낼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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