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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Jan 15. 2017

누군가의 진짜 크리스마스

레이캬비크 시내 산책

아이슬란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표를 살 때까지만 해도 마냥 행복했다. 여행 두 달 전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지내기가 녹록치 않을 것이란 얘기가 들려왔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열지 않는 데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을 수 있다고. 낭만이 산산히 부서지는 소리. 일기예보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아이슬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아닐거야"를 수없이 되뇌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도 예보는 바뀌질 않았다. 꼭 이럴 때만 쓸데 없이 정확하다. 


크리스마스 오전 9시 30분. 눈을 뜬지 한참 지났지만 침대 머리맡 창문으로 보이는 어두운 풍경에 일어나질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짐을 챙겨 나가는 걸 보고서야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느릿느릿 준비하고 아침까지 챙겨먹었는데도 바깥은 아직 어둠이 모두 가시질 않았다. 투어도 없는 이 하루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미 두 번이나 돌아본 레이캬비크 시내를 구경하는 것 뿐이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호스텔을 나와 눈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 천천히 걸어가는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눈이 치워진 길을 먼저 가기 위해 "Excuse me"하고 지나치려는데 "시내가는 길이니? 같이가자!"라고 두 사람이 날 불러세웠다. 그렇게 기타를 들고 유럽을 석달째 여행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자밀과 파리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만인 안토니와의 동행이 시작됐다. 


아이슬란드에 와선 너무 추워서 카메라도 제대로 꺼내질 못했다. 눈으로 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핑계를 대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걷기 바빴다. 함께 걷다 자밀은 계속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계속 같이 서서 기다리자 그는 "내가 사진을 찍고 있으면 신경쓰지 말고 그냥 걸어가"라고 말했다. 눈이 쌓인 자전거, 문닫은 가게 창문 크리스마스 장식 앞에서 그는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넌 어떤 사진을 찍고 있는거야?"

"그냥 일상의 풍경들. 내가 이곳을 기억할 수 있는 순간들. 그냥 길거리나 유명한 장소를 찍으면 그건 내 기억이 아니잖아. 사진 전문가는 아니지만 동생이 영화를 전공해서 어깨너머로 좀 배웠어."


그때부터 나도 다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여길 왔다고 인증하는 사진이 아니라 거리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모습들을 담기 위해서. 여러 번 지나쳤던 거린데 자밀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새로운 색깔과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밀은 아이슬란드에서 1년쯤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눈보라 속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귀를 의심하며 "Are you sure?"이라고 물었지만 그는 "여름도 궁금하니까"라고 답했다. 언몸을 녹이러 카페에 가는 길에 "너 진짜 이 날씨에도 여기 살 수 있겠어?"라고 재차 물었다. 그는 웃으며 "3개월쯤만 살아볼까?"라고 말을 바꾸었지만 언젠가 진짜 그가 여기에 살러 올 것만 같다. 





@할그림스키르캬 교회. 뒷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했다. 종파가 달라 예배 순서도 다르고 아이슬란드어로 진행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교회에 갈 수 있단 사실에 감사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유럽을 돌아다니며 오르간이 있는 교회는 여럿 보았는데 연주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늦게 가는 바람에 뒷자리에 보조의자를 놓고 앉아야했다. 기둥 때문에 설교자는 보이질 않았지만 오르간 옆에 앉을 수 있어 연주 과정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싶어 시간에 맞춰 할그림스키르캬 교회로 걸어갔다. 들어가면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단 얘기에 자밀은 얼마남지 않은 '낮'을 즐기기 위해 거리로 돌아가고 나와 안토니만 남았다. 대만에서 온 그에게 추위가 더 매섭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는 마냥 즐거워보였다. 


"내 인생의 진짜 겨울이자 첫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그는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눈이 내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내게도 눈 속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연신 부탁했다. 걸을 때도 새하얀 눈 위에 일부러 발자국을 내기 위해 눈길을 걸었다. 그리고 대뜸 "눈사람 만들어본 적 있어?"라고 물었다. 눈사람을 만들어 본 게 언제이던가. 말을 꺼내놓고 머뭇거리고만 있는 그를 위해 장갑을 벗었다. 온기로 눈덩이를 녹여 동그랗게 두 덩이 뭉쳐 순식간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안토니는 별 것 아닌 눈 두 덩이에도 신나하며 사진을 찍었다. 


내게도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는데 불평에 사로잡혀 잊고 지나칠 뻔했다. 외국에서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였다. 아이슬란드어로 예배를 드리며 오르간 연주에 맞춰 성가대 찬양을 들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였고, 오랜만에 맞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우연히 만난 친구들 덕에 넘어갈 뻔 했던 소소한 것들을 즐기며 감사함을 되새길 수 있는 크리스마스였다. 



@얼굴을 못 만들어준 눈사람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겨울을 즐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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