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 '엘리펀트 하우스'
몇 년 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를 봤다. 여섯 살 소년이 대학생으로 성장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매년 촬영해 한 편으로 묶었다. 2014년 개봉한 이 영화 속 시간엔 내가 지나온 시간들도 그대로 담겨있었다. 주인공의 누나가 침대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주인공 남매가 마법자 모자를 쓰고 해리포터 책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장면 등은 특별한 설명 없이 짧게 스쳐갔음에도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해리포터는 내 청소년기를 관통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마법 주문을 줄줄 외고 책을 몇 번이고 다시 볼 정도의 열혈 팬은 아니었지만 늘 책을 기다렸고 영화를 기대했다. 언젠가 영화를 보고 나오다 '머글들은 모르는 진짜 마법학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푹 빠져들기도 했다. 2011년 해리포터 시리즈 마지막 편이 개봉했을 땐 <마법사의 돌>부터 다시 챙겨본 뒤 영화관에 갔다. 상영관을 나오는데 오래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느낌이었다.
에든버러행의 목적은 '엘리펀트 하우스' 뿐이었다. J.K. 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했다고 알려져 유명세를 탄 곳이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정부 보조금을 받아 생활해야 했던 그때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글로 쌓아 올렸다. 가끔은 카페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를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이름은 이곳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책을 완성했지만 대형 출판사에서는 퇴짜를 맞았다. 작은 규모의 출판사와 겨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는데 발행 부수는 500부에 불과했다. 또 아동 판타지 소설계 주류가 남성이니 이름 대신 이니셜을 쓰자는 에이전시 권유에 조앤 대신 J를 그리고 친할머니 이름 캐서린에서 K를 가져와 J.K. 롤링이란 필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루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주인공들을 성장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고, 이야기 속에서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루는 마법을 부리며 흐뭇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어느 날엔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쪼들리는 생활비 걱정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줄어드는 커피에 눈치를 보며 늘 식은 커피를 마셨을지도.
아마도 그녀가 바라봤을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엽서를 쓰고 에든버러에서의 일들을 노트에 적어보았다. 계속 그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녀가 부러워졌다. 부와 명예가 아니라 그녀의 집념과 용기가 내게 없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그녀는 2008년 하버드 졸업식 연설에서 "실패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게 됐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롤링은 오래전부터 소설가를 꿈꿨고 현실이 꿈을 짓누르다 못해 숨 쉴 구멍 없이 짓밟을 때 오히려 '진짜 원하는 일'에 집중했다. 현실과 타협하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정공법을 택했다.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풀어보고 싶었지만 '난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어'라며 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싹을 잘랐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도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데 늘 자신이 없다. 더 잘 쓰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또 '역시 난 아닌가 봐'라고, 제대로 부딪쳐보지 않고 도망가려고 한다. 아주 평온한 상황 속에서 조차.
@그녀가 바라보았을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