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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Feb 15. 2017

다음이 있을까?_베를린 영화제

6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오랜만에 공항 가는 길이 설렜다. 리버풀에 갔다와서 풀지도 않은 가방을 들고, 같은 버스를 타고 고작 이틀 전 지나왔던 길을 따라 같은 공항으로 가면서도 '베를린 국제영화제'란 이름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초청을 받고 가는 것도 아닌데, 그냥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다. 시차를 생각 않고 있다 온라인 예매에 실패했지만 마냥 신났다. 가서 단 한 편이라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영화제에 왔단 걸 실감할 때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첫 발을 내디딘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고 영화제 부스는 조그마했다. 도시 전체가 영화제로 들썩일거라 생각했는데 숙소로 가는 내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행사장이 모여있는 '포츠다머 광장'에 가서야 빨간 곰과 공식 포스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책자와 빼곡히 적힌 영화 목록을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도 영화제 기념 가방을 멘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좀 허전했다. 배우와 감독을 볼 거란 기대로 온 건 아니지만 한껏 들뜬 나와 달리 베를린의 찬 공기처럼 조금은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머쓱해져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첫 영화(<이레이즈 앤 포겟>)는 '씨네스타 7'에서 봤다. 멀티플렉스 극장의 그다지 크지 않은 상영관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가 나오긴 했지만 방송에서 봤던 기립박수는 아니었다.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 기대도 조금씩 바람이 빠져나갔다. 집 더라면 앞 영화관에 온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왔더라면 외국인들 사이에서 영화를 보는 것만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테지만, 더블린에선 일상이니 무덤덤했다. 손에 들린 티켓만이 영화제에 온 걸 증명하는 듯 했다.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Friedrichstadt-Palast'에서 상영됐다. 영화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건물 밖엔 이미 줄이 길어 늘어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계단을 뛰어올라가 꽤 괜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지켜보며 상영을 기다렸다. 넓은 상영관이 빈자리 하나 없이 채워졌다. 옆 사람과 도란거리던 목소리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사라졌다. 재치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연기에 중간중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커다란 홀을 울리는 박수소리에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지막 영화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고스트 헌팅>)였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제라 더 끌렸다. 영화는 수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감옥을 재현한 세트를 만들고 이들이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을 역할극으로 만들어가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 


많은 유럽 국가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 유럽을 여행하며 홀로코스트를 반성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들을 많이 보았다. 유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함께 거론되는 게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가해자의 위치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한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왜 팔레스타인인들을 가두는지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이기에 감옥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팔레스타인 내에 얼마나 만연해있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영리한 연출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는 마지막에 '현재 감옥에 갇혀있는 7만 명과 투옥된 경험이 있는 750만 명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라고 말한다.  


운 좋게도 상영 후 감독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어 영화를 보여 들었던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궁금한 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장을 만들었다 지웠다 했지만 입술만 달싹거리다 결국 손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질문 덕에 의문이 해소됐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게 됐다. 일반 상영관에선 만나보기 힘든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또 감독의 의도를 바로 들어볼 수 있는 게 영화제의 매력이 아닐까. 


누군가 질문했다. "촬영이 끝나고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감옥 세트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왜 아이들에게 감옥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나?" 충격적인 답이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해 오래 토론했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겪어야 할 일이라면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겠단 데 다들 동의했다." 감옥을 경험한 이후 변한 자신을 가족들이 조금은 더 잘 이해해주길 바라며 가족들을 초대한 게 아닐까란 내 추측과 전혀 다른 답변이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왜 하루빨리 해결돼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영화제 행사장 근처엔 진회색 백팩을 멘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검정색 혹은 흰색 곰이 그려져 있고 '67회 베를린영화제' 로고가 찍힌 가방이었다. 여기선 메고 다닐 테지만 벗어나는 순간 바로 옷장에 처박힐 것 같아 소비욕을 꾹꾹 눌렀다. 하지만 과거 영화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선 마음을 바꿨다. 


같은 로고였지만 다른 모양의 가방엔 '66회'란 로고가 박혀있었다. 상영관 앞에서 줄을 서다 만난 중년 부부는 62회 가방을 함께 들고 있었다. 그때부터 사람들 가방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앉았던 자리 옆옆엔 52회 로고가 찍힌 가방이 놓여져있었다. 주인이 오면 '혹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영화가 시작할 즈음 들어와 끝나자마자 나가버리는 바람에 물어보질 못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예전에 참석했던 영화제 가방을 들고 온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런 영화 팬들이 있기에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견고하게 영화제가 유지되는 거라 생각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가방을 샀다. 블로그도 뒤지고 영화제 홈페이지도 들락거리며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헤매고 다니느라 놓친 게 많았다. 똑똑지 못한 주인 덕에 몸이 엄청 고생했다. '다음이 있을까?' 물음표가 따라붙지만 80회가 되기 전 67회 가방을 메고 올 수 있기를.  




@레드카펫 행사를 구경했다. 정확히 말하면 레드카펫 행사가 생중계되는 과정을, 뒷모습을 구경했다. 공식 파트너인 아우디 차량이 배우와 스태프들을 레드카펫 앞에 내려놓으면 사람들은 내려 손을 흔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들이 탄 차량 행렬만 보고 얼굴은 스크린을 통해 봐야 했지만 어쨋든 실제로 본 건 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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