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데르트바서와 에곤 쉴레
비엔나는 설렘 가득한 도시로 기억된다. 가보기 전부터 그랬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비엔나는 그런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진 못하더라도 골목마다 bpm 높은 에너지가 넘쳐날 것 같았다. 진짜 ‘그런 곳’인지 직접 가봐야 했다.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할슈타트에서 버스를 타고 비엔나행 기차가 서는 역까지 가야 했다. 전날 알아본 버스 시간에 맞춰 나왔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길 위엔 아무도 없었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해볼까 소심하게 손을 뻗었지만 눈사람이 된 날 태워주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정류장으로 나왔다. 잠시 뒤 버스가 도착했다.
기차는 떠나고 없었다. 표를 날리고 예매한 값의 배를 주고 새 표를 샀다. 돈을 아껴보겠다고 노력했던 것들이 한방에 무너졌다. 기차는 한 시간 뒤에나 온다고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해졌다. 온기를 기대하고 찾아간 카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다 포기하고 차가운 대합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따뜻한 기차에 오르자 온기와 안도감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뭘 떠올리고 두리번거릴 여유도 없이.
도착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에단 호크와 줄리엣 비노쉬가 영화 속에서 들렀던 카페였다. 그들처럼 카페 앞 테이블에 앉고 싶었지만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카페 문을 열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담배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고심해 고른 케이크는 매진이라 먹을 수 없었고, 문 앞 테이블로는 손님이 드나들 때마다 찬바람이 배달되었다. 일기장을 펴 비엔나까지의 여정을 끼적였다. 가끔 씁쓸한 커피를 들이켜면서.
훈데르트바서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비포 선라이즈>의 비엔나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대신 ‘훈데르트바서’ 좇기에 돌입했다.
쓰레기 소각장을 일부러 찾아갈 일이 있을까. 아무리 여행 중이라도 말이다. 사진만 봐선 도무지 쓰레기 소각장이라 믿기지 않는 건물을 만나기위해 한참 지하철을 탔다. 출구를 나서자 두리번거릴 틈 없이 하늘로 우뚝 솟아있는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에서 보던 열병합발전소의 삭막한 굴뚝이 아니었다. 당장 돈 주고 올라가야 할 것 같은 전망대 같았다. 알록달록한 외벽도 소각장 느낌을 상쇄시켰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넓은 소각장을 한 프레임에 담기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 같은 사람들이 주위에 여럿 있었다. 혐오시설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예술품으로 만드는 발상 전환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한 것 같다.
훈데르트바서가 만든 시영 아파트(훈데르트바서 하우스)와 박물관인 ‘쿤스트하우스 뮤지엄’도 들렀다. 놀이동산에 마련된 집처럼 알록달록한 아파트 앞엔 관광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부는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밖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건물 곳곳을 뜯어보았다. 둥근 부분이 아래로 오게 거꾸로 달아놓은 창문,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개성을 뽐내며 서있는 기둥, 건물 중간중간에 심긴 나무. 지루할 틈 없이 구성된 아파트 앞에서 쉬이 떠날 수 없었다.
나무 세입자권을 지켜줘야 한다. 식물이 자랄 땅을 빼앗아 집을 지었으니 옥상과 집 안에 나무들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훈데르트바서
쿤스트하우스 뮤지엄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검은색과 흰색이 체스판처럼 조화를 이룬 외벽이 인상적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었다. 어떤 면은 벽에 흰 페인트를 칠했고, 어떤 곳은 작은 타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면을 채웠다. 직선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한 훈데르트바서의 말을 건물 전체가 대변하고 있었다. 바닥도 평평하지 않았다. 그는 울퉁불퉁한 바닥이 도시 격자무늬 시스템(grid sysem)의 잔혹함 때문에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그에게 성냥갑을 빼곡하게 세워놓은 듯한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궁금해졌다.
우리는 잿빛에 몰개성 한 외벽을 지나치면서 그것이 감옥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 훈데르트바서
에곤 쉴레
처음 계획은 클림트 ‘키스’를 보는 것이었다. 비엔나에서 만날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림을 보기 전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미술사 팟캐스트를 찾아보다 ‘에곤 쉴레’ 이름을 발견했다. 체스키를 함께 여행한 동생에게서 들어본 작가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요약해놓은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예술과 외설 사이에서 지탄을 받았던 사람. 어린아이 누드화를 그려 마을에서 쫓아나기도 했고, 이웃 신고로 감옥에서 20여 일을 보내야 했던 사람. 28살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
속성으로 알고 간 그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시 비난을 받았던 그림 앞에선 현재의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시회지만 왠지 그림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제3의 눈이 어딘가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스 누드 조각상들을 볼 때와 그의 ‘작품’을 볼 때 왜 다른 마음일까. 이해받지 못한 삶을 살아온 에곤 쉴레의 자화상은 그래서인지 내게 쓸쓸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