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권이 생기고 참여한 첫 선거는 지방선거였다. 재수생 신분임에도 투표를 꼭 하고 싶어 학원을 빼먹고 한 표를 행사했다. 수많은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의 면면을 모두 파악하진 못했지만 나름의 판단 기준으로 마음에 담고 간 후보자 옆에 빨간 도장을 찍었다.
첫 대선은 2012년이었다. 17대 대선엔 불가피하게 해외에 나가는 바람에 참여하질 못했다. 저녁에 호텔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국 대통령 당선인 영상을 보며 '이변은 없었군'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18대 대선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투표소에 들렀다. 새벽 6시에 도착했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사전에 약속한대로 투표 후 손등에 도장을 찍어 투표 인증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2017년. 예상치 못하게 해외에서 투표를 하게 됐다. 탄핵으로 대선 날짜가 앞당겨졌다. 투표일이 확정되고 재외국민 투표 일자가 정해지자마자 여행 일정을 헤아려 국외부재자 신고를 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만 하는 도시가 됐다.
잠깐 해외에 머무는 동안 한국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최순실 게이트 초반만 해도 이렇게 커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뉴스에 치이는 삶을 살았던터라 더블린에선 뉴스와 담을 쌓고 살았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채팅방에선 지인들이 늘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주요 줄기가 잡히자 땅 속 고구마처럼 숨어있던 실세의 만행이 이곳 저곳에서 엮여나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추위에 아랑곳 없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남의 일인양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한국이 괜찮은지를 묻던 외국인 친구들은 '탄핵'이란 단어에 놀라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이전엔 사용한 적 없었던 impeachment란 단어를 앞으로 뇌리에서 지워낼 수 없을만큼 여러 번 쓰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부끄러워하며 얘기하는 내게 "우리 대통령(지우마 호세프)도 탄핵됐다"고 브라질 친구들이 농담을 건넸다. 따지고보면 대통령의 행동은 창피하지만, 그런 대통령을 좌시하지 않고 심판한 대중의 힘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번엔 더욱 더 꼭 해야만 했다. 설레는 맘을 안고 헝가리 대사관으로 향했다. 안은 한산했다. 줄을 설 필요도, 기표소 안에서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지 3분도 지나지 않아 대사관을 나섰다. 기대와 고민이 컸던 데 비해 투표는 싱겁게 끝났다. 당장 결과를 알 수 없으니 투표를 마쳐도 개운하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가 같은 마음일거라 믿지만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게 떠올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부디 이번엔 다르길, 제발 달라질 수 있길. 숙소 근처로 돌아가는 동안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