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 열거야!!"
유치원까지는 킥보드로 달리면 1분도 채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와 아들은 아파트 1층 현관문 앞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2층에 사는 아들 친구 루이가 현관문 앞에 앉아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루이는 오늘 아침 자기가 직접 문을 열고 싶어 했는데, 등원 시간에 쫓겨 마음이 급했던 루이 엄마가 무심코 먼저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의 절규가 아파트 로비의 높은 천장을 타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루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엇박자로 꼬며 울었다. 엄마가 달래도 보고 나중에는 화도 내봤지만, 루이는 이미 자기만의 단단한 고집 속에 갇혀버렸다.
다시 문을 닫고 자기가 처음부터 열겠다며 발버둥을 치는 그 광경을 보는데, 도저히 남 일 같지가 않아 마음이 짠해졌다.
당장 엊그제만 해도 우리 집 거실이 딱 저랬으니까. 우리 아들도 레고를 조립하다가 브릭이 마음대로 끼워지지 않자, 갑자기 짜증을 내며 애써 만든 성을 사방으로 던지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그럴 때 부모는 참 당황스럽다.
"겨우 이것 때문에?"라는 생각에 어이가 없다가도, 아이가 온 힘을 다해 폭발해내는 그 복잡미묘한 감정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진다.
흥미로운 건 이 지독한 시기를 부르는 이름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테리블 투(Terrible Two)’라고 부르며 무시무시한 시기로 정의하고, 일본에서는‘이야이야기(イヤイヤ期)’라며 "싫어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시기라고 한다. 나는 이를 ‘미운 다섯 살’이라 부르며 한숨을 섞는다.
표현은 제각각이지만, 이 시기가 부모의 인내심을 끝없이 시험하게 만드는 힘든 시기라는 사실만큼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 아이가 자아를 폭발시키며 세상을 배워가는 이 뜨거운 성장에 국경은 없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루이 엄마가 내게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소란스러운 틈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오며 나는 그녀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당혹감과 미안함이 섞인 그녀의 눈빛에 나는 '괜찮아요, 우리 집도 장난 아니에요'라는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눈인사를 건넸다.
험난한 육아라는 전쟁터에서 똑같은 적(아이의 고집)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전우끼리 나누는 묵직한 '동지애'였다.
유치원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언제 그랬냐는 듯 루이가 씩씩하게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 끝으로 점차 작아지는 두 아이를 배웅하고 나서야, 루이 엄마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잔잔한 미소를 나누었다.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자식 키우는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이미 완벽하게 통하고 있었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저 서로의 처지를 알아주는 눈빛 하나면 충분했다.
육아의 고단함은 그렇게, 언어를 초월한 눈치로 따뜻하게 통역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