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잠바 주머니 속에는 작은 우주가 산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비밀 창고

by 찰나 지나

외출 후 돌아온 아이의 잠바 주머니를 무심코 뒤집었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 작은 공간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뭇잎 몇 장, 언제 넣었는지 모를 꼬깃한 티슈, 그리고 길가에서 주운 작은 나무막대기가 보물처럼 들어 있었다. 가끔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이나 예쁜 낙엽을 "엄마, 선물!"이라며 꺼내 놓기도 한다.
아마도 아이의 주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담는 자신만의 비밀 창고인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그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손톱보다 더 작은 오렌지 씨앗 티끌 하나가 툭 떨어졌다.


주머니 속의 작은 흔적


그 작은 씨앗 티끌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니 며칠 전 장보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아들은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엄마, 오늘은 내가 할게!"라며 제 몸집만 한 카트를 야무지게 끌어당겼다.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들뜬 목소리에는 엄마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이는 마치 중요한 임무를 맡은 기사라도 된 양, 어깨를 한껏 으쓱거리며 통로를 누볐다.

계란 한 판이 깨질세라 조심스레 내려놓고, 좋아하는 요구르트와 치즈를 카트에 담을 때마다 나를 돌아보며 "엄마, 나 잘하지?" 하고 뽐내기라도 하작고 투명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카트를 미는 작은 등과 바퀴를 조절하려고 발끝에 야무지게 힘을 준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가슴이 벅찼다.


알 수 없는 아이의 의도


장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 생오렌지 주스를 나눠 마시다 입안에 걸린 씨앗 파편을 뱉어낸 아들에게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그냥 길가에 버려~"

하지만 아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세게 젓고는 손톱만한 씨앗 조각을 제 주머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저 씨앗 파편에 불과한데, 아이는 왜 그것을 소중히 챙겼을까?

나뭇잎이나 그림처럼 누군가에게 줄 선물로 여긴 것인지, 아니면 차마 길가에 함부로 버릴 수 없었던 아이만의 단단한 규칙이었는지 그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타인에겐 그저 길바닥의 먼지일 뿐인 조각조각들을 아이는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정성껏 옮겨 담았다는 사실이다.


잊어버려도 괜찮은 순수함


집에 돌아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놀이에 빠져 그 씨앗의 존재를 홀랑 잊어버린 아이.

길가에 버려지지 않은 대신 주머니 속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에서 며칠을 함께 뒹굴었을 그 작은 조각을 보며 다시 한번 피식 웃음이 났다.
끝까지 기억해서 버리는 완벽함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진지하게 씨앗을 주머니에 챙겨 넣던 그 맑은 마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들의 볼록한 주머니 속에서 잡동사니가 보물로 변하듯, 아이가 남긴 이 사소한 흔적들 덕분에 나의 평범한 하루도 소중하게 빛난다.


매거진의 이전글파리의 도시락 #2:차가운 바게트 VS 따뜻한 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