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픔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상처받기 쉬운 그대에게

by 찰나 지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


서울에서 바쁘게 일하던 시절, 유독 마음이 쓰이던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늘 밝고 웃음이 많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웃음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만들어낸 연약한 가면이라는 것을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를 밤새 곱씹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실은 누구보다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사소한 일조차 그녀에게는 매번 무너져 내릴 만큼 커다란 사건이 되곤 했습니다.

"그걸 왜 아직도 생각하니", "그냥 잊어버려" 같은 위로는 그녀가 느끼는 아픔의 깊이에 가닿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건지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마음을 하소연하며 울먹이는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저 '이 아이는 세상과 부딪치는 매 순간이 우리보다 훨씬 더 아프구나'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껍질이 없는 사람


예전에 한번 읽으려다 내용이 너무 무거워 도중에 덮어버린 책이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입니다.

우연히 다시 마주한 책 속에서 저는 그 동생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니, 제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던 '상처받는 이들'의 민낯을 보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책 속의 문장들은 신랄하다 못해 날카로웠습니다. 주인공 요조가 인간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죠.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매 순간을 처절하게 괴로워하며 살 수 있을까?" 싶어 자꾸만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기만하면서도 신기하게 아무도 상처 입지 않으며 그렇게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실로 눈부신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예가 인간의 삶에 충만해 있습니다.

《인간 실격》 '첫 번째 수기' 중에서


남들에게는 그저 세상 사는 요령이자 '명랑한 불신'일 뿐인 그 공기가, 껍질 없이 태어난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모래바람일 수 있겠다는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죄어왔습니다.

그녀가 타인의 말에 유독 상처를 잘 받았던 건, 타인의 감정을 걸러낼 '피부' 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왜 그토록 아파했을까.'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의문이 풀리며, 그때 내가 마주했던 그녀의 마음이 사실 얼마나 깊은 곳까지 멍들어 있었을지 비로소 가늠해 봅니다.


상처받기 쉬운 섬세한 다정함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해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거절당할까 봐 늘 상대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의 조심스러운 몸짓들.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광대짓'을 하며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속으로는 공포에 떨고 있던 주인공 요조.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었던 가장 슬픈 방어 기제였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는 "조금 더 단단해져 봐"라는 말을 위로랍시고 건네왔습니다. 하지만 말의 오만함을 반성하게 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상처받는다는 건, 역설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그만큼 더 세밀하게 느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이제는 그녀가 가진 예민함을 '고쳐야 할 약점'이 아니라 '섬세한 다정함'으로 바라봐 주려 합니다.

그녀가 왜 그토록 아파했는지, 이 지독한 소설 덕분에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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