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엥 교수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2013년 10월이었다. 8월 말에 나이로비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박사 연구를 시작했는데 2개월 가까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 시점이었다.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정보를 찾다가 나이로비의 모 대학에서 있었던 건축가들과 도시공학자들의 학회 일정을 발견했다. 나는 건축가도 도시공학자도 아니었지만, 인류학자로서 연구하던 주제가 나이로비의 길과 도시변화였기 때문에 케냐 전문가들의 학회 발표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참석을 신청했다.
학회가 시작되기 전에 혼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멀뚱히 앉아 있는데 키가 아주 크고 나비넥타이를 한 50대의 신사 한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듯이 "너는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으셨다. 그분이 바로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이로비 구석구석으로 나를 이끌어주신 오치엥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은 건축학으로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벨기에와 남아공에 유학도 다녀오셨고, 특히 남아공에서는 인류학자들과 일했던 경험도 있으셨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에 대해서 재빨리 이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주변 제자들과 동료들에게 나를 소개하여 주시고, 전화번호와 연락처를 주시면서 언제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도 몇 번이나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이 운영하시는 건축설계사무소와 요직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분들을 만나러 가시는 곳에도 따라나갔다. 교수님의 키가 아주 커서 목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봐야 했지만 한마디 한마디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 없었기에 열심히 귀담아 들었고, 짧은 다리로 교수님의 큰 보폭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오치엥 교수님을 생각하면 특별히 떠오르는 몇 가지 추억이 있다.
교통체증을 피해 아침 일찍 나이로비 시내에 도착하여 마타투에서 내리면 가끔 인터뷰할 사람을 만날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거나 예정되어 있던 약속이 취소되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코이나게 스트릿에 있는 자바 커피숍으로 향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읽으며 요거트를 얹은 과일을 먹고 계시는 오치엥 교수님이 있는 곳이었다. 따로 약속을 하지 않은 날에 그렇게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하여 드리기도 하고, 드시고 계시던 음식값을 계산해드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돈을 내느냐고 야단야단을 하셨다 (나한테 사주신 것이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그렇게 함께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면 꼭 교수님이 알고 지내시는 한두 명의 지인들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나이로비의 고학력 지식인 사회는 굉장히 좁다). 가끔 친한 친구분들이 옆에 서있는 나에 대해서 물으면, 교수님은 "내가 입양한 딸이다"라며 농담을 하셨는데, 그 말을 가끔 너무 진지하게 알아듣는 분들이 계셔서 함께 박장대소할 때가 많았다. 언젠가는 내가 먼저 중국에서 입양된 딸이라고 하니 한 신사분이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셔서 한참을 웃었던 적도 있다.
교수님은 덩치는 그렇게 크시면서 마음이 여리셔서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셨다. 사실 이것은 나이로비 사람으로서 굉장히 드문 일인데, 시내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바쁜 나이로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중에서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는 분이셨다. 게다가 마치 생활비라도 보태 주듯이 꼭 100실링이나 200실링을 챙겨주셨었는데, 언젠가는 수중에 잔돈이 하나도 없으셔서 "타이(나이로비 사람들이 나를 부르던 이름), 미안한테 저기 00엄마에게 100실링만 지금 줄 수 없겠니"라고 너무나 미안해하시면서 부탁하신 적도 있다.
교수님은 외국인인 내가 어디서 소매치기를 당할까 걱정하시고 늘 주의를 주셨는데, 정작 본인이 유행하는 소매치기 수법에 넘어가셔서 전화기를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언젠가 한동안 교수님과 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마타투에서 도둑들이 흔히 이용하는 방법에 당하셨다며 다른 번호로 연락을 주셨다. 신문에도 보도되어 크게 알려졌던 이 수법은, 먼저 뒤에서 앞으로 동전을 떨어뜨리고 앞사람에게 떨어진 동전을 주워달라고 하면서 앞사람이 몸을 숙인 사이에 옆에 있던 공범이 주머니에 있는 전화기를 슬쩍하는 것이었다. 아까운 전화기를 도둑맞고 고생하신 교수님이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웃음도 조금 나왔다. 늘 그렇게 내 걱정을 하시면서 본인이 그렇게 싱겁게 당해버리시다니. 그것도 결국은 남을 돕기 좋아하시는 교수님의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냐에서 알고 지낸 다른 어른들 보다도 오치엥 교수님에 대해 내가 조금 더 특별한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되었던 계기도 하나 있었다. 2014년 4월, 친하게 지냈던 한 케냐 가족들과 이런저런 오해로 사이가 틀어져서 숙소도 옮기고 그 와중에 병도 나서 건강이 좋지 않았었다. 신세를 지고 있던 수녀원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틀어박혀서 정원과 부엌에서 일하거나 대문을 지키는 일꾼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지내던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그 날이 왔다. 4월 16일이 말이다.
나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어떻게 가눌 길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그렇게 순식간에 잃다니. 인터넷 기사와 동영상을 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오치엥 교수님의 전화가 왔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서 전화를 일부러 몇 번이나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후 교수님이 다시 연락을 주셨을 때는 죄송해서 전화를 받았는데, 교수님은 마치 나에게 큰일이 났었던 것처럼 안부를 물으시며 혹시 나의 친구나 가족이 그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냐며, 왜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았느냐며 걱정을 풀어놓으셨다. 모든 케냐 사람들을 통틀어서, 특히 그런 국제뉴스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나의 가족 및 친구들에 대한 안부를 챙긴 사람은 오치엥 교수님이 유일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교수님이 너무나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들을 만났던 일과 교수님이 내 논문의 한 챕터를 차지하는 큰 내용의 실마리를 던져주셨던 것도 정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서도 교수님은 국제전화로 나의 안부를 물으셨고, 지금도 가끔 메일로 내가 잘 지내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남한과 북한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염려를 하신다.
언젠가 나이로비로 돌아가서, 이른 아침 코이나게 스트릿에 있는 자바 커피숍에 앉아있는 키다리 교수님을 또 한 번 놀래켜드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