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에서 구멍가게 알바를 한 사연
마마 조니를 처음 만난 것은 사실 현장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아는 집의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집에 들렀던 나와 집 방향이 같아서 함께 마타투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인연을 맺었다.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 동안 그녀가 정류장에서 일하는 마타투 기사들과 차장들을 정말 많이 안다는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정류장에서 주스를 만들어 파는 부업을 하고 있었다. 혹시 연구를 위한 인맥을 쌓는데 도움이 될까 마음이 약간 혹하기는 했었는데, 마마 조니를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라 뭔가 부탁하기 뭣한 마음에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마 조니를 이런저런 기회로 몇 번 더 볼 수 있었는데, 또 언제부터인가는 한참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넘은 연구를 마치기 한 4개월 정도 전에 어쩌다가 내가 정말 매일매일 지나갔던 마타투 정류장에 있는 빨간 코카콜라 광고를 칠한 구멍가게 양철 박스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주로 정류장 사람들의 군것질거리와 주변 사람들의 생필품 따위를 파는 곳인데 벌써 몇 개월도 전에 인수하여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늘 바쁜 걸음을 재촉하느라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또 그녀와 다른 공간에 있었던 것이었다.
마마 조니를 다시 본 것도 반가웠지만, 솔직히 그녀의 구멍가게라는 공간은 내게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만나도 삶이 거칠어 보이는 정류장 호객꾼(일명 삐끼)들과는 도대체 대화를 할 용기가 없었다. 마타투 기사들이나 차장들과도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측정불가의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아서 하루하루 조바심에 불편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는데 말이다. 나는 심지어 마타투 이야기는 논문에 쓰지 말자는 마음까지 먹었다 (마타투는 케냐 사회에서 너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마마 조니와의 재회로 나는 '이제 시간도 임박했고 밑져봐야 본전이다'는 생각에 시간이 날 때면 늘 그녀의 가게에 들르기 시작했다. 그 좁고 캄캄한 공간에서 밖으로 향한 작은 구멍을 통해 정류장 사람들과 마타투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포츠만 담배 두 개비는 10실링, 루스터 담배는 세 개비에 10실링, 탄산음료 유리병은 30실링, 플라스틱병은 60실링, 만다지 하나는 5실링, 땅콩 한 봉지는 10실링, 우유 500m는 50실링...... 바쁜 마마 조니 옆에서 보조를 서면서 가격도 익히고, 파는 요령도 알아갔다.
그렇게 물건을 파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정류장의 일상과 그곳의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수개월의 시간 동안 매일 봤던 사람들인데도 도무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는데, 마마 조니의 가겟집에서 일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는 그 공간이 내 경험의 변화로 철저하게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 같았다.
가겟집에서 일을 한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고된 노동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남성적인 마타투 세계의 노동에 비루한 체력과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동참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 대신 나는 정류장이라는, 이동과 노동의 중계 현장에서 사람들을 알아갔다. 그것은 탑승과 환승의 기능적인 경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였고 또 마타투라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어떤 문화적 통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물건을 팔 때는 정신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미친 듯이 노트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짧지만 빈번하게 이어지는 대화, 귀를 귀찮게 하는 소음, 숨을 차단하는 듯한 매연냄새, 마타투를 둘러싼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 하나하나가 정말 귀중한 에뜨노그라피(문화기술지)였다. 비록 연구비 경쟁에서 채택되지는 못한 에뜨노그라피지만 그 깊고 풍부한 세계에서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지금도 가끔 그 캄캄한 가겟집 안을 떠올린다. 너무나 좁았지만 또 너무나 넓었던 그 공간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에너지가 없았더라면 아마도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