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로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할 때면 은공(Ngong) 시장 종점에서 내려 수많은 길거리 상인들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다가 한구석에서 싸구려 핸드폰을 파는 언니들(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총칭하기 위해서 언니라고 부른다) 옆을 꼭 지나가고는 했었다. 그중에 한 언니가 "지쿠! 지쿠!" 하고 나를 불러 세우려고 하고는 했었는데, 나는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건 완지쿠(Wanjiku)라는 키쿠유(Kikuyu) 공동체에서 가장 흔한 여자이름(한국말로 치면 영희 같은 느낌)을 줄여서 성별이 여자인 사람을 그냥 대명사처럼 부르는 말이었다 (키쿠유 가정이라면 집집마다 완지쿠가 꼭 한 명은 있을 정도이고 주로 큰 딸의 이름으로 쓰인다). 그러다가 하루는 또 "지쿠, 완지쿠 (얘 영희야!)"라고 그렇게 나를 계속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이 빵 터졌고, 그 언니를 비롯한 주변 언니들이 까르르 웃는 바람에 결국 안면을 트고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이면 언니들이 장사를 하는 곳에 들려서 수다를 떨고 가는 의례가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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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언니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귀가할 때, 지름길을 찾아 동네 안의 비포장 도로로 들어가면 꼬마 래비스의 집이 있었다. 래비스에 대해서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 2012년 여름방학 때 래비스의 엄마와 아빠가 길가에서 과일을 팔던 조그만 가게에서 바나나를 자주 사고는 했는데 2013년에 돌아가서 보니 그 가게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아, 다른데 가버렸나 보다... 하고 아쉬워하고 한 달 정도를 보냈는데.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자리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 관리실 겸 구멍가게의 조그만 창가에서 누군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안티~ (아줌마~)"하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다가가 보니, 이게 누군가. 아기 래비스가 이제 꼬마 래비스가 되어서 손을 흔들고 있는 거다. 이제는 어엿한 유아원 원생이 되어 영어도 할 줄 알고 몸집도 두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기, 아니, 꼬마 래비스네 가족과 다시 상봉을 하고, 종종 군것질 거리를 가지고 꼬마 래비스를 보러 가는 것은 또 다른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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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비스네 가게에서 왼쪽 골목으로 꺾어서 걸어가다 보면, 주변 아파트 공사장 인부들에게 아침과 점심을 만들어서 파는 마마 마이크의 가게가 나왔다. 아침에는 만다지(mandazi, 일종의 도넛)와 차이 그리고 점심에는 우갈리(ugali, 옥수수 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에서 만든 주식)와 수쿠마 위키(sukuma wiki, 케일의 일종)를 파는 세 아이의 엄마 로즈의 가게였다. 큰 아들 브라이언은 케냐에서 흔한 기숙학교에 가 있고 (영국식 교육제도의 영향이다) 둘째인 셰일라와 막내인 마이크는 아침저녁으로 만다지를 사 먹으러 오는 나를 보러 일하는 엄마 옆에 나와 있었다. 막내인 마이크는 수줍음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다가오지도 않고, 두 손을 자기 가슴팍에 살포시 얹은 포즈로 마냥 웃으며 서 있었다. 가끔은 사탕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사탕을 사주지 않는다고 콧물까지 흘려가면서 우는데, 그것도 참 귀여워서, 그다음 날에는 사탕을 가지고 가서 다른 아이들 몰래 집에 가서 먹으라고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했다. 그런데 또 그 호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사탕이 뿅, 하고 빠지는데, 혹시나 다른 아이들에게 들킬까 싶어 나 홀로 혼비백산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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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시내로 나가고, 또 돌아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수다를 떨면서 노닥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궁금하다. 아직도 시장에는 언니들이 장사하고 있을까. 래비스와 마이크는 얼마나 컸을까. 로즈 아줌마는 여전히 따뜻한 만다지를 만들어 팔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