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싸돌아다녔다
논문을 지도해주셨던 교수님으로 부터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선생님이 지금 지도하는 (한국사람이 아닌) 학생이 한국에서 현장연구를 하는데 조언을 좀 줄 수 있겠냐는 메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인맥을 만든 너의 경험을 좀 공유해달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인맥을 만들긴 만들었다. 지금 누구한테 조언을 해주라면 쉽게 해보라고 말도 못 할 일인데 조금 젊었던(?) 시절이라, 또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용감했던(?) 시절이라 그렇게 저질렀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일이다. 그 학생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는 중이다. 딱히 정답도 없고,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또 용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운이 없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 그런 복잡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바바 브라이언을 떠올렸다. 그는 내가 연구를 마쳐가던 시점에서 만난 마타투 기사였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싶은 아쉬움도 남았던 사람이었고, 하루하루 내 머리와 마음을 꽉꽉 채워줬던 전문가였으며, 복잡한 나이로비의 도로에서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interlocutor였다.
바바 브라이언은 마마 조니를 통해서 만났다. 마마 조니는 내가 잘 알던 한국인 가정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였는데(가사도우미는 케냐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직종이다), 언젠가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이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안면을 텄고, 그이의 아들이 내가 가르쳤던 수업에 들어오면서 친해졌던 사연이 있다. 마마 조니는 내가 아침저녁으로 버스를 타고 내리던 정류장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나름 투잡을 뛰는 엄마였다. 나는 우연히 물을 사러 들렀다가 그이의 구멍가게에 홀딱 반해서, 그이가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대신 가게를 봐주는 무급 알바를 시작했다. 덕분에 거기서 음료수나 과자, 비누, 밀가루, 담배 따위를 팔면서 많은 버스기사들과 차장들 그리고 호객꾼들(버스 승객을 채워 넣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바바 브라이언은 이 구멍가게에 점심을 먹으러 들르던 기사였는데, 예전에는 정류장에서 과일주스를 만들어 팔았던 마마 조니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기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가게에서 마주치던 바바 브라이언의 인상이 참 편하다는 생각에 언제부터인가 시내에서 집으로 가기 전에는 그이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어디쯤인지 물어보고 일부러 시간을 맞춰서 그의 버스를 타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돌아오곤 했다. 그이는 도시 곳곳에서 내가 눈 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건과 현상들을 보여주며 설명해주는 사람이었다. 하도 경찰의 단속에 많이 걸려서 (이건 마타투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나이로비 시내에 안 가본 경찰서가 없다고 말하면서 경찰들이 어떻게 뇌물을 주고받는지 알려준 사람도 바바 브라이언이다. 그이는 또 가끔 내 차비는 받지도 않으려고 했고, 나를 기사식당과 버스 수리점 등에 데리고 가서 내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하였던(하지만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덕분에 다른 기사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또 수리점에서 나를 보고 신기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된 노동으로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을 내게 내밀며 너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운 손을 가진 팔자니 간식이라도 사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수리공들과 대화를 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간식을 살 수밖에 없었다).
바바 브라이언을 만나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방인에게 살가운 미소로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주셨던 건축가 오치엥 선생님, 복잡한 나이로비의 도로에서 고생하는 앰뷸런스 기사들, 부자동네에 숨어있는 빈민가 공동체를 이끌면서 도로공사에 맞서야 했던 할머니 지도자들, 하루하루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 팔아서 겨우 먹고살면서도 수요일이면 언제나 나와 시간을 보내주던 친구들, 내가 지친 몸으로 귀가할 때까지 따뜻한 저녁식사를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다가 오늘은 어디에 갔었니, 내일은 어디에 갈거니, 물어보면서 대화를 나눠줬던 메리. 나는 그이들을 만나려고 15개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나이로비와 그 주변을 계속 '싸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하나하나 엮은 것이 바로 내 논문이 되어버렸다. 한순간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치열한 이동의 기록이고,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겪은 '멈춤' 조차도 교통체증이었으니,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도시의 움직임 속에 있으려고 용을 썼던 것 같다.
그 학생을 만나면 해 줄 수 있는 말도 결국은 이렇다.
I just never stopped 'wal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