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는 잠잠하다가 다시 벌어진 케냐의 테러상황을 접하면서 여러가지 기억과 감정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3년 9월, 이제 막 박사논문 연구를 시작한 시점에 소말리아 무장단체 알샤밥이 일으킨 웨스트게이트 쇼핑몰 테러는 내게 배움과 고민을 동시에 던져준 경험이었다. 테러를 경험한 도시의 사회적 지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이런 사태가 벌어져도 연구자는 연구는 계속 해야하는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계속 했다) 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원래는 관심도 없었던 테러에 대한 글까지 기고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이런게 바로 한 사회를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준비해야 하는' 능력인가 (가끔은 모르는 주제로도 글을 후다닥 쓸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내 페이스북과 메일함에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가득했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구나, 뭔가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연구조교로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교수님은 몹시 걱정이 되셨는지 당장 케냐를 떠나라는 아주 단호한 이메일을 보내셔서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초보 인류학자로서는 괜히 울적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매우 현실주의자였던 어떤 교수님이 "씨엔엔에서 고급 쇼핑몰이라길래 너가 그런 곳에 있을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특별히 걱정하지는 않았다"는 묘한 걱정메일을 보내주셔서 잠시 웃을 수밖에 없었던 수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만감이 교차하던 순간에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시내 한복판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주망 아침, 아이의 손을 잡고 커피 한 잔을 하러 간 사람도 있었고, 물건을 사러 자주 가던 쇼핑몰에 습관처럼 들린 사람도 있었으며, 배우자의 발령 때문에 이국에 도착하여 이제 막 적응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몇 주동안 현지의 일간지에 실린 사망자들의 사연들을 읽으면서 나는 은연중에 그 쇼핑몰 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은행에 들리는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떠나지 않았다. 1년을 넘게 나이로비를 걷고, 또 그 도시의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마치 내 발로 몸으로 도시의 지도를 그리고야 말겠다는 듯이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후에도 몇 건의 테러가 멀지만 또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고 나이로비와 폭탄이 뉴스에 뜬 날에는 어김없이 나의 구식 핸드폰에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뜨곤 했지만, 떠나는 것은 나의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타이, 우나오고파? (두렵니?)"
어느날인가 미니버스에서 폭탄이 터져서 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 날, 스와힐리어 선생님 엘리아스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그런것을 두려워 하면 이 사회 깊숙이 들어와서 일하는 인류학자로서는 실격'이 아닌가 싶은 고지식함에 망설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그 때의 내 느낌을 표현하자면 뭐랄까, 두렵다기 보다는,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오늘 나는 나이로비에 있는 지인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안도하는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어쩌면 2013년에 내게 메일을 보낸 그 두 교수님들의 마음을 뒤늦게 실감하는 듯도 하다.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던 나이로비.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준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나마 깊은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