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해제 1: 미스터 김은 누구인가

by 심한수

최근 영어로 말을 해야 했던 어떤 모임 자리에서 누군가 나를 소개하면서 그냥 00김이라고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열심히 앞에 붙일 말을 찾아서 “미즈 00 김”이라고 부르는 것에 발끈해서, “저기요, 닥터 김입니다”라고 말하고 웃으며(웃는게 웃는게 아니었지만) 말을 이어받았는데. 그러다가 문득, 내가 “미스터 김”이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2013년에 미국에서 케냐로 필드워크를 떠나기 전, 초행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누군가를 만나고 인터뷰를 꼭 따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에 이메일을 미리 보냈다.


기본적으로 내용은 이랬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인류학자인데 혹시 지금 건설하고 있는 그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연줄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듯 시작했던 대학원생 연구자에게 돌아오는 답장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에 한 공무원으로 처음 받았던 답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미스터 김,”


내가 이 메일을 보여줬을 때 당시 동학하던 미국 친구는 박장대소를 하며, 나중에 이런 연구는(도시의 지도를 바꾸는 연구랄까) “당연히” 미스터 김이 할 것이라고 추정된 것에 대해서 글을 써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그 답장을 보내주었던 공무원과는 몇 달 동안 매일 얼굴을 볼 정도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렇게 답장을 했던 것을 기억하냐고 물으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안나는 것 같다고도 해서 딱히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 2015년, 나는 필드워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엔가 논문을 한 챕터 정도는 쓴 상태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동과 공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였는데 나 빼고는 죄다 유럽인들이었던 그 자리에서 쭈그러들지 않고 발표하기 위해서 전투적으로 글을 쓰고 발표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살아야 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발표 전날, 내가 지내고 있었던 비즈니스호텔의 로비에 내려가 인쇄를 좀 부탁하고 다시 올라왔다. 몇 시간이 지나서 저녁시간이 되었고 잠깐 나가서 끼니를 해결하려고 호텔방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발에 뭔가 톡 걸리는 느낌에 내려다보았더니, 내 발표문이 가지런히 접혀서 하얀 봉투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봉투의 겉면에는 알아보기 쉬운 글씨로 또박또박 “815호 미스터 김”이라고 쓰여 있었다.


참으로 저렴했지만 또 깔끔해서 만족스러웠던 그 비즈니스호텔의 방에서 나는 혹시 체크인 정보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미스터 김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어쨌거나 그렇게 내 연구가 시작부터 끝까지 미스터 김의 연구가 되는 것 같다는 묘한 우스움에 그 봉투 겉면의 글씨를 사진으로 남겨뒀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2016년 8월, 나는 늘 동료들의 논문 심사를 응원하기 위해 기다렸던 문 앞에서 이번에는 나의 논문 심사 결과를 듣기 위해서 나를 응원하는 친구들과 함께 서성거리고 있었다. 몇 분인가 흐르고, 또 몇 분인가 흐르고,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는 지도교수님은 그의 길고 마른 손을 내게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콩그래츄래이션, 닥터 김.”


그렇게 나는 미스터 김이라는, 어떻게 보면 봉인과도 같았던, 그 비자발적인 가명(?)으로 부터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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