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만난 할머니
오랜만에 밟는 유럽 땅이었다. 물론 포르투갈은 처음이었다. 비슷한 연구주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리스본 대학의 워크숍에 참여하러 간 참이었다.
필드워크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내 연구에 대해서 발표를 해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좀 있었다. 날씨가 바뀐 탓인지 감기도 심하게 걸렸다. 서로 유럽인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나는 유일하게 유럽인도 아니었고, 유럽학교 출신도 아닌 그런 이방인 중의 이방인인 인류학자였다. 발표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감기에 잠긴 목소리로 다 했고, 워크숍은 끝이 났다.
지친 몸으로 자유를 누리러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갔던 리스본은 정말 아름다웠다.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래도 관광 명소는 한 군데 가야겠다는 생각에 성 조르제 성을 선택했다. 언덕길을 돌고 돌아서 올라간 성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또 바람에 몸을 기대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피로가 느껴져서 트램을 타기로 했다. 유럽에서 많이 보이는 전차이다. 그런데 이 트램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그런지 죄다 만원이다. 나는 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걸어서 내려가다가 또 다른 정류장에서 한번 더 시도해보기로 하고 앉았다. 하지만 역시 또 만원 트램이 왔다. 그다음도 똑같았다. 이제 나는 마음을 비우고 빈 트램이 올 때까지 편안히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푹 퍼져 앉았다.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어로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 한참을 이야기하신다. 나는 포르투갈어를 몰랐다. 고맙다는 뜻의 오브리가도(Obrigado)말고는 아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가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듣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가 관광객들이 이렇게 많아서, 나는 여기 이 동네에 이렇게 사는 사람인데, 트램을 타고 시내로 가려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 수가 없어. 너도 지금 탈 수 있는 트램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그 순간 할머니와 내가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 좋아서 트램을 기다리는 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고개도 끄덕끄덕하고, 또 영어로 맞장구도 쳐주면서 함께 트램을 기다렸다.
드디어 빈 트램 하나가 덜컹거리면서 우리를 향해 내려왔다.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손짓을 했다.
"얘, 이거 타야 된다. 이거. 얼른 같이 타자."
나는 할머니와 그 트램에 올라 시내 광장을 향해서 내려갔다. 할머니가 빈자리까지 챙겨서 나와 함께 앉으려고 한 덕분에 할머니의 뒷자리에 앉아서 몸도 편안했다. 얼굴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미소가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할머니는 알까. 당신이 방금 내게 완벽한 리스본 여행을 만들어줬다는 것을...'
리스본은 아름다웠다.
감기와 스트레스로 지친 시간을 보내고 왔으면서도 지금 묘하게 그곳이 그리운 것을 보면, 나는 그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그 할머니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