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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Jul 24. 2016

세 잔은 마셔야 하는 커피

영어를 모르는 아버지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들과 아버지의 언어를 모르고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길잡이가 길을 나섰다. 침묵 속에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서 함께 버스 두 대와 전철 하나를 갈아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들어본 적도 없어서 철자를 불러달라는 사람에게 철자를 불러주면서 "동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예요"라고 설명을 했다. 그런데 문득 나 역시 이 나라에 대해서는 이름이 긴 어떤 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신생국이라는 것 밖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항 근처를 지나가는데 아들은 착륙하는 비행기를 한참 동안 눈으로 쭈욱 따라간다. 자신도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왔을 테지만 눈 앞에서 날아가는 비행기는 여전히 생소한 대상일 테다. 내가 얼굴로 "응, 비행기야"하고 응수를 해주니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아이가 혼자서 먼 길을 다녀야 하는 것이 걱정이 되는지 아버지는 계속 아이에게 손짓으로 주변을 살펴라 이것저것 좀 꼼꼼하게 봐라고 난리고 아이는 또 그런 아버지가 귀찮다는 듯이 알겠다고 애써 고개를 끄덕거린다.
 
볼일을 다 보고 아홉 명의 아이들과 부부가 방 두 칸에서 복작대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작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나는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된다고 안된다고 앉으라고 성화다. 할 수 없이 앉아서 보니 그 이름이 긴 나라의 음식을 파는 음식점에서나 보던 커피를 끓이는 도구들이 놓여 있다. 그렇잖아도 집안 구석구석에 달려 있는 장식들을 보면서 그 이름이 긴 나라와 문화적인 연관이 있겠구나 싶었더랬다. 그 음식점에서 우리 아버지가 저게 신기해서 시키셨다가 너무 써서 드시지를 못했던 기억에 웃음이 났다 (사진은 그 때의 사진). 나도 그 쓴 커피를 마셔야 일어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각오하는데 이분들의 커피 문화는 약간 다른지 달콤한 탈지분유를 한가득 집어넣는다. 호리병 같은 도구에 푹 끓인 커피가 넘쳐서 흐를 때까지 따라주는 아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케냐 생각이 잠깐 났다. 언제나 그렇게 넘치도록 따라야 하는 그 손님 대접이 가끔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것도 이제 그리움의 일부분이 되었다.  
 
조그마한 잔을 입으로 갖다 대는 동안에도 출렁거리면서 넘치는 커피를 후후 불어서 살짝 머금었다. 달달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내가 맛이 너무 좋다는 표정을 지으니 부부도 만족한 표정이다. 한 잔을 비우고 일어나는데 또 깜짝 놀라면서 안된다고 성화다. 세 잔은 마셔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표정이 다들 사뭇 진지하다. 할 수 없이 앉아서 또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결국에는 심지어 네 잔을 마셨다. 오늘 잠은 다 잤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또 얼마나 따뜻하고 재밌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나라에서 절반의 사람들이 아랍어를 쓴다는 것도 처음 알아서 "나는 학생입니다"나 "나는 한국에서 왔습니다"와 같은 교과서 아랍어를 더듬거리니 어른들도 아이들도 다 같이 웃음이 나온다.  
 
집에 돌아오니, 카페인에 약한 나는 손가락이 덜덜거리고 심장이 벌컥거려서 눕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궁금증에 떨리는 손으로 검색을 해보니 그 나라에서 커피는 전통적으로 세 잔 이상은 마셔야 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잔에서 손님에 대한 의식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직도 입 안에는 그 달달한 커피의 맛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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