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지숙 씨는 19살이었다. 고향땅이 불바다가 되고 있던 즈음, 천만다행(?)으로 지숙 씨네 식구들은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아프간 난민캠프에 살고 있었다. 지숙 씨가 대여섯 살 때였던 80년대 중반, 소련군과 무자헤딘(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 반군)이 길고 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숨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아이들을 보호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지숙 씨의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는 것을 결심했고, 지숙 씨는 엄마의 손을 잡고, 또 아빠의 등에 업혀서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민캠프에서 자라는 많은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지숙 씨는 여러 가지 언어들을 쓰면서 자랐다. 부모님을 통해서는 페르시아어 한 갈래이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언어인 다리(Dari)를 배웠다. 그리고 난민캠프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절반 이상의 아프간 사람들이 쓰는 또 하나의 국어인 파슈토(Pashto)를 자연스럽게 익혔다. 난민캠프의 학교에서는 파키스탄의 국어인 우르두(Urdu)를 배웠는데, 틈틈이 지지직거리던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던 파키스탄의 드라마들을 본 덕분인지 어쩌다 보니 모국어만큼이나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또 학교에 봉사하러 오던 외국인 선생들을 통해서 영어도 조금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유창하게 말을 할 정도로 배우지는 못해서 뭔가 아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지숙 씨는 집안의 소개로 함께 난민캠프에 있던 남편을 만났다. 그 역시 대부분의 인생을 캠프에서 지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나마도 전쟁터로 변한 모습에 대한 기억밖에 없어서 오히려 식구들이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페샤와르의 난민캠프가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부부는 세 아이들을 낳았고, 남들보다는 좋은 기회를 얻어 재정착 난민 지위를 얻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미국이라는 땅에 살러 가게 된 것이다.
지숙 씨 부부는 이제 캘리포니아에 있는 호텔에서 객실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좀처럼 구해지지 않은 직장을 얻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부모 보다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는 것이 큰 낙이지만, 지숙 씨 본인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을 배워오는 아이들과의 거리감도 걱정이다. 큰 아이들은 영어를 못하는 부모에게 떼를 쓰기도 한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뭔지 모를 반항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에 없던 수입이 생기고 이런저런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최소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난민캠프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