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abari Kenya

케냐에서 멕시코 드라마를 봤던 사연

나의 텔레노벨라 입문기

by 심한수

처음 케냐에 갔던 2010년 12월, 정말 진귀하고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재미있었던 경험은 주변 지인들과 한 멕시코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가 되었던 일이다.

당시에 나는 케냐 중부의 도청 소재지와도 같았던 니에리(Nyeri)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친구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손바닥 같이 좁은 집에 부엌도 있고 거실도 있고 침실도 있었는데, 매일 저녁 그 거실에서 친구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 옹기종이 앉아 또 손바닥 만한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했다.

지금은 또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저녁뉴스가 끝나고 이런저런 오락프로그램이 방영되고, 8시 정도가 되면 케냐의 모든 주요 채널에서 텔레노벨라(남미에서 인기가 많은 드라마 장르)가 방영되곤 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상당히 놀라웠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남미 출신의 인구가 많은 애리조나에 있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텔레노벨라에 꽤 익숙한 편이었지만, 스페인어권도 아닌 동아프리카에서 텔레노벨라를 접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드라마들이 영어로 더빙이 된 상태로 방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텔레노벨라 특유의 막장드라마, 즉 격정적인 줄거리와 애정행각이 케냐 사람들에게 통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게다가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던 <In the Name of Love (En Nombre del Amor)>의 인기는 실로 어마어마해서 주요 채널이었던 시티즌 티비(Citizen TV)에서 재방영까지 편성할 정도였다!

나는 사실 텔레노벨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도 아니었고, 남미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음모와 질투, 그리고 비밀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텔레노벨라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던 터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케냐 친구들과 텔레노벨라를 시청하면서 거기에 점점 빠져들더니 나중에는 내가 더 열심히 챙겨보는 우스운 상황에 까지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아주 재미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니에리 시내의 유명 빈민가에 들어가 일을 하고 나오는데 우리를 빤히 쳐다보던 꼬마가 "팔로마~"라고 나를 불렀다. 우리 일행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팔로마가 위에 언급한 <In the Name of Love>의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배우는 길고 검은 생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길고 검은 생머리를 가진 내가 팔로마 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난 거기서 텔레노벨라 배우의 외모와 가장 근접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였던 셈이다.

그런 추억을 쌓고 다시 학기를 보내러 애리조나로 돌아갔다. 텔레비전을 켜면 온갖 텔레노벨라가 방영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케냐에서 그렇게 재밌었던 텔레노벨라가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애리조나는 원래 멕시코 땅이었고 주변에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텔레노벨라의 본고장과도 비슷한 곳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재밌게 볼 수 있는 텔레노벨라는 어쩌면 좀 특별한 텔레노벨라 인지도 모르겠다. 케냐에서 친구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말도 안 되는 막장 이야기에 함께 흥분하면서 보던 그런 텔레노벨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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