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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Apr 05. 2018

케냐로 돌아갔던 이유 3

떠나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케냐에서 2010년의 마지막을 보내고, 2011년을 맞이했다. 5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조 아저씨의 고향인 니에리(Nyeri)에서 4주 정도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자원활동을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이로비로 돌아왔다.


케냐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답'을 확실하게 얻었던 것은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였다. 택시 창문 너머로 먼지와 교통체증으로 복잡한 도로에서 신문과 담배 등을 팔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딱히 그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고, 그건 그냥 내 감정의 버튼이 묘하게 눌러졌던 그런 순간이었다. 작별에 대한 아쉬움, 더 알고 싶다는 마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미련......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켜있음을 느꼈다. 마타투를 다시 타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키베라를 비롯한 다른 크고 작은 슬럼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기사의 옆좌석에 타고 있던 아저씨는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뒤를 돌아서 나를 쳐다보았고, 우는 내 얼굴을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아저씨가 참 고마웠다. 내가 스스로 추슬러야 했던 감정을 잘 헤아려주었던 것 같았다. 그 날 내가 혼자 펑펑 울었던 것에 대해서 우리는 나중에도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케냐로 돌아오는 나를 보았으니, 아저씨도 아마 내가 왜 케냐로 돌아왔는지, 그날의 눈물이 무슨 의미였는지에 대해서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에 돌아와서 어떻게 하면 다시 케냐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운이 좋게도' 나는 인류학자였고, 인류학자에게 있어서 가고 싶은 곳에 가기 위한 명분은 언제나 필드워크, 즉 현장연구였다. 당시 나는 현장연구를 중국이나 한국에서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그 겨울방학 후에는 어떻게 해서든 케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도 교수에게도 원래 가지고 있던 연구소재를 케냐와 동아프리카의 맥락에서 살펴보겠다고 설명을 했다. 다행히 소재는 가져가면서 지역을 바꾸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지도교수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 소재도 바꾸게 되었기에 다른 지도교수를 찾았다), 이후의 여름방학에는 예비연구라는 명목으로 나이로비를 방문했다.


그렇게 나는 케냐로 돌아갔고, 또 돌아갔고, 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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