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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Apr 06. 2018

꼭 읽어야 하는 편지

영화 The First Grader 그리고 배움에 대한 고민

얼마 전에 마라톤을 잘하는 칼렌진(Kalenjin)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오랜만에 내가 그 공동체 중 하나인 마라퀫(Marakwet) 사람들이 사는 곳을 방문했던 때를 회상했다. 마라퀫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칼렌진의 또 다른 분파인 포콧(Pokot) 사람들과 유혈분쟁의 관계에 있었다. 가축이나 물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마 양쪽 다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마라퀫 사람들의 땅과 포콧 사람들의 땅 사이에는 강이 하나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 한국 수녀님 한 분과 케냐 신부님 한 분을 따라 그 강을 건너 포콧사람들을 만나러 갈 기회를 얻었다. 고작 강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그 척박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마라퀫 사람들의 땅에는 그나마 나무도 있고 가축들이 뜯어먹는 풀이라도 있는 것 같았는데 포콧 사람들의 땅은 그야말로 사막처럼 보였다. 가축도 소나 염소뿐 아니라 낙타가 흔했고 초록빛의 자연환경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사막과도 같은 땅을 한참 달려서 그곳의 학교에서 일하시는 케냐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을 만났다. 공식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포콧 사람들의 문해율은 케냐 평균의 절반도 되지 않고 사실상 학교 선생님들이나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을 어떤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슬펐다? 놀랐다? 아니, 난 비참했다. 대체 학문을 직업적으로 하는 내가 배우고 쓰고 읽고 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총체적인 혼란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이미 세 개의 학위가 있었고, 2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상태였다. 더불어 케냐의 국어인 스와힐리어를 조금 읽고 쓰는 수준까지 되었으니 단 하나의 언어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문해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 문맹에 대한 가치판단을 감히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포콧사람들이 읽고 쓰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일상과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가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The First Grader>가 생각났다. 80이 넘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읽고 쓰는 것을 배운 케냐 노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주인공인 마루게는 젊은 시절 케냐가 영국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키쿠유 공동체의 일원으로 싸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고 몸과 정신에 장애를 안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 2003년, 경제학자이자 관료 출신의 므와이 키바키(Mwai Kibaki) 대통령의 정부가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시행한다. 마루게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동네 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주변의 만류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최고령의 초등학생이 된다.


포콧 사람들도 마루게와 같이 '꼭 읽어야 하는 편지'가 있을까. 그 공동체에도 문해를 얻는 것이 간절하게 다가오는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가축과 물을 얻는 것이 중요한 포콧 사회에서 문해는 정말 필요가 없는 것일까. 포콧의 땅까지 뚫고 들어오는 아스팔트 도로와 개발의 손길이 그들이 가진 전통적인 삶과 공존할 수 있을까. 포콧 사람들도 다른 공동체들이 그랬듯이 문해와 지식으로 무장하여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대비해야 하는 것일까. 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동시에 내가 가진 30여 년의 교육 특권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그 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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