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by 김짜란

형광 노란색의 개나리, 진노란색이 아니다.
밑으로 들어가면 잔뜩 구부러져 손을 뻗은 어둠.
무성한 생명력이 아래서 보면 무한한 죽음에 가깝다.
마치 상여 같이. 화려한 꽃가마. 그러나 안에는 시체가 머나먼 길을 간다. 혹은 버려져 묻힌 무덤.
차가워진 손을 가만히 보았다. 짧고 얇고 평평한 농부의 손톱.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손. 그 딱딱한 손이 상여 안에서 차갑게 굳어있다. 검은색에 가까워진 손은 원래 그 손 색이었으므로 이질감은 없었다. 그저 상여를 따라 움직이는, 염이 되어 깨끗한 그 모습이 차가울 뿐.
이상하게 그의 손은 어둡고 단단한 편이었다. 어릴 때를 제외하곤 한평생 갓을 쓰고, 한복을 다려 입고, 침을 놓거나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그였다. 꼴을 벤다고 하는 풀베기도, 나무 장작을 패오기도, 밭을 일구는 일도 어릴 적 일이었다. 16살 결혼하기 전까지. 그 뒤로 상여에 오르게 된 것이 86이었으니 70년간 크게 탈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한평생 어두웠다.
뜨거워서 탄 것일까. 그가 탈이 난 내 배를 쓰다듬을 때마다 한 생각이었다. 대략 다섯 치의 긴 침을 쑤셔 꽂을 때도, 그의 손은 뜨거웠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는 침통이 따듯했다. 그는 종종 이곳저곳을 다녔다. 마을을 대표하는 어른으로, 의사로, 선생으로 다양했다. 아주아주 가끔은 빌어먹을 이로 나갔다. 일제 사람들을 만나고 산으로 산으로 파고든 그였다지만 힘이 있지 않았고, 살해당하지 않으려면 속세에 나가야 했다. 그런 날마다 그는 그 뜨거운 손으로 병나발로 막걸리를 들이키며 들어왔다.
내가 빌어먹을 놈이다. 지키질 못한다. 이 땅을, 이 땅의 건아들을.
그게 그가 뜨거운 손으로 마중 나오는 자신의 아들 딸을 쓰다듬으며 하는 한탄이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그날만은 이 말만은 많이 했다. 광복이 되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자리에 앉아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걸 보면, 속이 끓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한평생 속을 끓이고 끓이다가 결국 뜨겁고 까맣게 된 것이다. 막내아들 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막내아들과 딸을 고국에 바쳤다. 딸의 시신이 광복 바로 두어 달 전, 아들의 시신이 한 달 전 차례로 왔다. 그들의 시체는 알아볼 수 없이 까맸다. 무슨 짓을 한 건지 팔뚝에는 주삿바늘이 가득했고, 보통의 시체들과 달랐다. 마치 불에 달군 못 같았다. 그래서 그도 그걸 보고 불에 달군 못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도 그를 뽑을 수 없었다.
벚꽃 같이 웃던 뺨을 갖은 막내 고모는 그때 10대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는 유달리 내 뺨을 자주 어루만졌다. 조금은 거칠고 뜨거운 손으로 살살 어루만지고, 할머니와 셋이 잠에 들게 했다. 장손인 큰오빠는 그것을 싫어했다. 특히 할머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엄연하게 장손인 큰 애가 있는데 어떻게 둘째의 막내 손녀를 데리고 윗목에서 자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그것이 커질 무렵 말을 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그가 뱉은 말은 곧 법이었다. 제 어미에게 매 맞고 와서 편들어달라 제 조부모의 방 앞에서 우는 것이 어디 장손이 할 짓이냐고. 제문도 제일 잘 읽는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디 빛을 보겠느냐고. 그의 말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빛을 보고 가지 못한 고모의 덕에 빛을 본 아이였다. 덕에 여자애를 공부시켜서 어디다 쓰느냐는, 공장이라도 보내라는 말을 아무도 내 앞에서 할 수 없었다. 감히 그 말을 꺼냈다가는 그 거친 손이 올라가는 일이 생길 테니까.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닌, 거칠고 딱딱한 손이.
그를 도와준 것은 여자들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아파 죽어 가던 그를 살려낸 것은 새하얀 피부를 갖은 벽안의 외국인이었고, 아픈 그를 품어준 것은 벚꽃잎들이 모인 곳이었다. 꽃잎들은 병 앞에서 불꽃이었고, 언제나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고치는 제 아버지의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기로 했다. 공부가 필요한 직업이었다. 그 고생을 해서, 일본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대학교까지 들어가 정말로 의사가 되었다. 사실 첫째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한시도 그걸 잊은 적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밭일을 하고, 제가 결혼하고 나서, 대학에 가 있는 동안에도 밭과 사투를 벌이던 여동생들과 남동생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라고 못할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 앞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봄에 내리는 기이한 겨울비에 떨어진 꽃잎들 대신 내가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의 눈처럼 밝은 빛을.
내가 기억하는 한 그의 눈은 항상 밝았다. 보통 나이가 들면 테두리가 흐려지는데 그는 한차례도 그러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서 나온 나는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그는 광복 이후 제 결정을 믿는 식솔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몇 차례 읍내에 나가거나 경성에 다녀온 후의 일이었다. 노망이 났다는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그는 식솔을 데리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고, 그가 다시 산에서 나왔을 때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미군의 트럭에 그 식솔들을 다 태웠으니, 다른 마을보다 공간이 남아 이불도 기구도 많이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수용소에 가서 흙을 파 구역을 나눈 텐트 안에서 잠들 때, 덕에 우리 식솔들은 덜 추웠다고 했다. 이불을 두껍게 깔 수 있어서. 배식도 그러했다. 그중 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알아보았고, 어르신이라며 대우를 해주어서 배고팠지만 사리분별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다시 초토화가 될지 모르는 땅을 두고 수용소의 인원이 차니 밖에 집을 짓거나 차지하고 살아도 된다는 미군의 명령이 있었을 때도 우리는 수월하게 집을 지었다. 그래서 학교보다 집이 나았다. 학교가 다 부서져서 임시 기둥을 세우고, 다시 학교를 세울 때 즈음 태어난 나는 나뭇바닥에 왁스칠을 해가며 학교 청소를 했다. 70명이 오전과 오후를 채우는, 그런 가득하고 따듯한 학교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이 더 좋았다. 그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를 떠났던 식솔들도 돌아왔고, 소문을 듣거나 텐트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항상 학교보다 좋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판판하고 딱딱했다. 고생하지 않은 사람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갈 즈음, 빨간 벽돌집을 사서 지을 만큼은 안되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새로 지은 집에서 그는 나를 얻었다. 그저 시기가 겹친 거겠지만 내가 태어난 후 가산이 는다며, 쌀 가마니를 이고 오는 쌀장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명절 때 들어오는 선물들도 그저 보다가, 내 선물이면 유일하게 먼저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여자가 있는데 남자가 집안 선물을 먼저 풀어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라 할머니는 그를 보며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그는 어딜 나가던지 간에 마중 나오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읍내에 나갔다가 오면 문 밖에 쪼그려 앉아있다가 고무신을 신고 내달리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나를 안아 올리면 그는 전체적으로 단단했고 뜨거웠다. 그게 여름이라면 시원하고 까슬한 옷 아래 그게 느껴졌고, 겨울이라면 차가운 피부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느껴졌다.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달려가면 언제건 안아 올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을 그렇게 해주듯 말이다.
대학에 입학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뜨거운 화염병을 겁내지 않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내게 뜨거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뜨거움에 눈을 떴고, 그랬기에 망설임 없이 불꽃을 만들어 세상에 던졌다. 뿌연 세상, 검고 차가운 것들을 두른 사람들에게, 그가 입던 한복의 재질처럼 얇은 입마개를 하고서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불꽃에서 태어났으면, 불꽃으로 살아야지.
압박에 못 이겨 휴학하고 내려온 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떠올린 것이 그의 생 초기 꽃들인지, 중기인지, 먼발치의 것들인지, 지척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꽃들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방 바깥의 개나리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으므로. 모두들 그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유별나게 군다면서 대학을 가고 관직을 차지하는 나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어릴 때처럼 달려가면 안아 들어주진 못해도, 커서 세상의 비난에서 나를 안아 들어주었다. 더 커진 힘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떠나는 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 세상이 무너졌으니까. 정말 그 다운 죽음이었다.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갓을 쓰고, 깨끗한 버선을 신고, 좌선한 상태였다. 그런 그 앞에서 나도 나다워야 했기에,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상여에 같이 누워있을 뿐이다. 염하고 나는 냄새가 시체의 냄새는 사라지게 했다. 어쩌면 그의 뜨거운 내면이 사라져 냄새도 모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했듯, 긴 잠 앞에서 천천히 그의 가슴을 토닥여본다. 자장자장 우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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