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좀 사랑해주면 안되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 크고 다부진 몸에서, 단단한 인생에서, 그 틈을 비집고 기어이 눈물이 떨어진다. 작게도 아니고 뚝뚝. 피마냥. 그만큼 아픈 것이라.
김자인. 이름마저 스스로를 이끈다는 뜻이다. 그만큼의 인생이었다. 첫째 아들로 태어나서 보통 말하는 장남의 기대를 받았으나, 둘째로 태어난 딸, 경인에게 뺏겼다. 고래 경자에 이끌 인. 고래를 이끄는 거대한 사람. 둘째는 리더쉽있는 천재였다. 그걸 뛰어넘을 순 없었다. 공부가 재밌다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걸 보며 자인은 내가 집안 기둥은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했다. 개척하다 보니 악바리가 생겼고, 과거는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불같은 성질이 된 것이다. 그 성질은 군대에서 돋보였다. 너 같은 독기가 필요하다, 패기가 필요하다는 말에 부사관이 되었다. 스스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군인은 자인이라는 이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듯 했다.
허나 어디나 천재는 있었고 1등은 있었기에 저는 잘하는 걸 했다. 죽을 때까지 해보는 거. 그래서 부사관학교에서도 2등으로 졸업을 했다. 완벽한 군인은 아니어도, 2등은 될 수 있으니까. 또 내가 버티면 저새끼보다 오래 군인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저는 불같은 사람이라 화르륵 타올랐다가 꺼진다고 생각하겠지만, 불은 쇠를 녹이고 인내와 고통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만든다. 그게 자인이었다. 용광로 그 자체인 사람이었으니 그가 군대에서 빛을 발하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군인이 아니라도 빛을 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인은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인생을 이끌었다.
가끔 본가에 돌아가면, 언제나 서글서글 웃으며 기둥 역할을 하는, 큰 사람이 된 동생이 있었다. 그걸 보며 안심도 되고, 내 선택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첫째의 무게를 갖지 않는 것과 갖지 못하는 건 다르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명품을 사드리는 동생을 보자면, 사고가 나도 재빠르게 처리하는 1등을 보자면 순리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강인해졌다. 자격지심따위 없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걸음마다 짓밟아 없앴다.
단결.
그러던 어느날 들어온 하사 하나가 자인의 인생의 큰 점을 찍었다. 장완도. 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이었다. 자인은 귀찮아서 빡빡 깎은 머리, 어두운 피부, 큰 목소리, 화가 나면 내는 사람이었다. 제 인생을 끌어가는 동안 생긴 성질머리라는 것 아래 있는 성격들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임은 윤기가 나는 하나로 묶은 머리, 하얀 피부, 명확하지만 크진 못한 목소리, 화가 나면 일단 참고 침착하려는 아이었다. 모든 일에 머리가 먼저 돌아갔다. 그 아래 있는 감정들보단.
외모와 성격을 넘어, 하다못해 이름도 달랐다. 자신은 스스로 인생을 끌어가는데 얘는 흐를 완에 연꽃 봉우리 도자를 쓴다고 했다. 흘러가는 연꽃 봉우리.
안맞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잘 맞는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이상적이고 분석적이라서. 일단 몸으로 부딪혀봐야 아는 거지. 현실이라는 부조리함 앞에서 정의를 읊고 있는 성격이 답답했다.
잘맞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둘이 비슷하다고 했다. 둘 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아닌데. 나는 관심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그냥 그 애와 너의 관심범위가 다를 뿐, 그 안에서는 같다고. 너희 둘이 꽤 상호보완이 잘 된다고. 그래서 팀으로 묶고는 했다.
온 미.
실력은 있는 애라서 잘 따라붙기는 했다. 상명하복도 잘 되기는 했으나 제 의견을 내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그게 싫었다.
선임이 우스워?
아닙니다.
경인이가 생각났다. 잘근 잘근 밟아온 저의 모자람이 자꾸 그 애만 보면 생각이 났다. 1등이 자꾸 생각이 났다.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그 모습이 저보다 나아보여서, 그래서 생각이 났다. 그리고 제안은 언제나 옳을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고,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인데 제가 아닌 다른 선임과 임무를 나갔을 때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일을 잘하는 후임이니 예쁜 동시에, 너무 잘하니까 불편한 후임. 차라리 비슷하면 내 주니어다 생각했을텐데, 너무 달라서 자인은 성가셨다.
말을 해, 말을.
성가신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다치면 티를 내야 사람들이 아는데, 그래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북이가 놀라면 껍질 속에 쑥 들어가듯이, 상처받거나 놀라면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억울해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일단은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고, 자신의 부족이 무엇이었는지 묻고, 나중에서야 오해를 풀었다. 좋은 방법이라고는 하나, 군대에서는 나중에 오해를 풀 기회는 없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를 하되 아닌 것은 아니라 밝혀야 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다. 희생하고도 모른 척 입을 꾹 다물었다. 팀끼리는 그런 것이지만, 남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승진제도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래야 먹고 사니까. 그런데도 얘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답답해서 자인은 목소리가 더 커졌다.
너 뭐 모자라? 그 새끼들이 고깝게 굴면 기 싸움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장교들과의 기싸움에서도 끼지 않거나, 그저 져주거나, 자신이 손해보는 일을 택했다. 그걸 보면 자인은 화를 냈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쟤가 그러면 다른 애들도 그래야 하니까. 내가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완도는 웃어보였다.
편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니 편 든 거 아니야.
그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말이 없는 자인이었다. 그래서 알면 잘하라는 말만 남길 뿐이었다. 잘하라는 말에 완도는 잘 흘러갔고 어느새 자인이에게도 흘러들어갔다. 정신을 차리면 자인은
장완도 어딨어?
제 후임을 찾고 있었다. 제 후임에게 꿍쳐둔 것을 먹으라고 툭 던져주었다. 그때마다 완도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크기가 얼마던, 가격이 얼마던 그건 상관 없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른이면서 츄파츕스 250원짜리 하나에 웃어보였다. 그게 이상해서, 이상적이라서 자인은 따라 픽 웃게 되었다. 상사의 말대로 완도는 자인과 상호 보충이 잘 되었다. 자인이 열받아 들이받으면 완도는 그것에 따른 근거를 보충했다. 백이 생긴 느낌이었다. 제 인생 첫 백이 드디어.
니가 내 등 맡는 거야. 후방 주시 잘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술이 들어가 울렁거릴 때, 그것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뱉어냈다. 꾹꾹 숨겨두었던 마음이었는데, 누군가에게 기댔다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쓰러질 몸뚱이를 스스로 끌어올릴 걱정을 하느냐 못뱉었던 마음이었는데 뱉었다. 그리고 완도는 감사하다며 또 웃었다. 매일매일 웃는 사람이었다.
이대위하고 사귀잖아.
그래서였을까, 녹은 것은 자인 뿐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훨씬 더 빨리 녹아 완도를 물들였다. 그 덕에 완도는 생글생글 푸른 잎이 싱그러운 귤마냥 웃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완도는 너무나도 푸르렀고, 상큼했고, 강렬했다. 그것이 너무 쨍해 자인은 속이 아파왔다. 너무 신 걸 먹어버린 아이처럼 속이 쓰렸다. 가까우니까 더 그러했다. 일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었으니 심심하면 장난을 치던 것도 관두고, 주말에 종종 보던 것도 관두었다. 하지만 완도는 색색깔 물드느냐 자인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멀어지는 자인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완도는 이대위라는 사람의 색으로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래서 매일 잘 웃던 완도는, 색 주인이 슬프면 슬퍼지고, 화나면 화가 났다. 색 주인 마음대로 완도는 갈팡질팡했다. 비바람이 오면 오는대로 흔들리는 꼴이 마치 장마를 잔뜩 맞은 들장미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꽃도 작으면서 뭣한다고 장마 기간에 피어났는지, 바보같이.
중사님 저 어떻게 합니까?
거리를 벌려놨건만 완도의 방황에 오히려 자인의 마음이 짓이겨졌다. 토네이도처럼 빙빙 도는 그 애가 자인의 속을 쑥대밭으로 뒤엎었다. 지가 뭐가 모자라서 그런 취급을 받고도 꾸역꾸역 연애를 하나 싶더니, 기어이 차였다. 화가 들끓어 따지고 싶었지만, 파리한 얼굴을 보자니 맥 없이 화가 식었다. 그 창백한 얼굴이 용암을 뒤덮어 식혔다. 자인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저 애를 좋아한다고. 저 애가 태양이고, 나는 저 애 주위를 도는 것이라고.
태양은 제 주위 별들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면서 어느 것이 떨어져 나가도 온전하지만, 떨어져 나간 별은 그렇지 않다. 아예 세상이 바뀐다. 주기적으로 들던 빛이 사라지면, 중력이 사라지면, 행성은 캄캄한 우주에 덩그러니 떠나간다. 그래서 자인은 무서웠다. 제 마음을 급하게 꺼냈다가, 잔뜩 짓이겨진 제 마음이 흉해서 버려질까봐. 그렇게 제가 버려져 둥둥 떠다니게 될까봐. 그래서 마음 대신 술잔만 채워줄 뿐이었다. 몇번이고, 꽁꽁 모자이크를 해 놓은 제 마음 대신 투명한 술을 따라주었다. 그 동안 문드러진 마음은 바람을 쏘이지 못해 썩어버렸다. 그곳에서 오는 통증이 나날이 심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이 죽지는 않았다. 그 애가 살아나면 자인의 마음도 살아났으니까.
장완도는 김자인의 마음을 너무나도 쉽게 낫게 했다가 다시 짓이겼다. 그게 억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순리라는 걸 받아들였다. 항상 제 인생을 개척하던 자인은 자신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여버린 것이다.
너는, 씨발 무슨 사랑이 그렇게 많냐.
그래서 결국 어린아이 같은 말을 내뱉어 버린 거다. 죽을만큼 아파서, 더는 아프기가 싫어서. 조금 더 멋진 말이었으면 좋겠지만, 두어번의 연애를 몇년간 지켜본 자인은 그럴 여유가 없다. 자신의 몸이, 마음이 조각나서 진물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으니까. 꽉꽉 숨겨두었던 상처들이 결국 둑이 터져 진물을 쏟아내버린다. 진물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게 또 서러워서 자인은 우는 것이다. 운다는 건 아직 어리다는 증거다. 자인은 이걸 다 감당하기엔 어렸던 것이다. 그 또한 억울하다.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아지는지. 분한만큼 벅벅 눈가를 닦아낸다. 눈가가 새빨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