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네 가지 얼굴들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 1998년 데뷔해서 올해까지, 딱 20년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연기했다. 데뷔 후 긴 시간이 지나기 전에 김주혁은 아버지 김무생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연기에는 자신만의 무언가가 또렷이 존재했다는 의미였다. 김주혁의 예민해보이는 무표정에는 많은 게 담겨있었다.
그가 이 시대 최고의 배우였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그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객과 시청자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김주혁은 모두에게는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배우일 수 있었다. 김주혁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담긴 작품들이 있다. 작품과 연기, 그러니까 배우로서 그를 기억하는 일은 배우로서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던 김주혁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눈썹 위에 붙인 반창고,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셔츠 소매, 무표정한 얼굴에 툭툭 내뱉는 까칠한 말투. 경찰 최상현은 우리가 사랑했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2005) 속 김주혁의 얼굴이다.
갑자기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무작정 프라하에 온 그는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우연히 한국 여성 윤재희(전도연)를 만나 도움을 청한다. 큰 도움을 받고도 심드렁한 상현의 태도에 화가 난 재희는 그의 말투를 꼬투리 잡아 몰아세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바로 그 명장면이다.
"야! 너 나 알아? 내 이름 알아? 내 나이 알아? 쌀이 반말이야. 콩이 반말이야. 도대체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초지일관 말이 반토막이냐고! (…) 고마워할 줄 모르면 미안해 할 줄은 알아!" 그러자 상현은 재희를 바라보며 "고마워. 진심이야. 고마워"라고 답한다. 이 말에 재희는 도리어 "아니 그렇게 바로 사과하면 무안하잖아요"라며 얼굴을 붉힌다.
김은숙 작가의 독특한 대사, 이 대사를 현실성 있게 살려낸 전도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장면에서의 압권은 역시 김주혁의 얼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섞인 그의 묘한 표정은 "진심"이라는 말을 재희가, 그리고 시청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했다. 그게 바로 화를 냈던 재희가 당황해 뒤돌아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김주혁이 연기한 최상현은 겉으로 무심한 듯하지만 속 마음은 따뜻한 캐릭터의 시작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주혁 또한 깐깐해보였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2005)에서 광식은 7년을 짝사랑했던 윤경(이요원)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다. 여성 관객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서글픈 얼굴로 최선을 다해 부르던 그의 모습에 많은 남성 관객은 아직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이제훈/엄태웅) 이전에 김주혁의 광식이 있었다.
광식은 7년 동안 윤경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다. 윤경도 광식에게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언제나 사랑에 앞에 소심한 태도를 보인 광식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윤경이 광식에게 건넸던 "오빤 참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대사는 묘하게 마음을 들었다놨고, 많은 남성들이 마음에 있는 여성에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아파하곤 했다.
여성 시청자가 좋아했을 만한 얼굴이 상현이라면, 남성 관객이 지지했던 얼굴은 광식에게 있었다. '프라하의 연인'과 '광식이 동생 광태'는 같은 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주혁에게는 이렇듯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오갈 수 있는 좋은 얼굴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는 배우였다. 윤경처럼 말하자면, 김주혁은 참 좋은 배우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설득력을 부여하는 배우가 있다. 이런 배우들은 환상 속으로 가볍게 날아가버릴 것 같은 작품을 현실이라는 땅위에 굳건히 발디딜 수 있게 한다. 영화가 아무리 감독의 예술이라고 해도 좋은 배우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주혁은 극에 리얼리티를 부여할 수 있는 배우였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뷰티 인사이드'(2015)에서 김주혁의 출연 분량은 10분 남짓이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등장해서도 설정상 자칫 가볍게 흘러갈 수 있는 이 작품에 감성의 깊이를 더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이수야. 우리 헤어지자." 이 흔하디 흔한 대사에 김주혁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았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미안함, 고마움, 아쉬움, 슬픔, 서러움, 그리고 사랑까지 온갖 감정이 다 있었다. 그는 이별을 선언하고 서둘러 뒤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이 어떤 건지도 알았다.
김주혁의 연기를 사랑했던 시청자와 관객은 아직 그와 헤어질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너무 젊은 나이에 떠나서 마음이 아프다"는 고두심의 말에는 어떤 과장도 없기에 더 와닿는지도 모른다.
김주혁은 드라마 '아르곤'의 명대사를 직접 골랐다. 그가 선택한 대목이 바로 "우리에겐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150개의 스토리가 있다"라는 대사다. 김주혁은 이 대사에 대해, "드라마 복귀를 결심할 수 있었던 부분"이라며 "이 작품은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드라마다"라고 말했다.
김주혁이 '아르곤'에서 연기한 김백진을 '정의로운 기자'로 정의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 그는 다만 직업 윤리에 철저한 인물이었다. 기자이기 때문에 팩트를 찾았고, 힘겹게 건져올린 팩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려 했다.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대개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당당함이 김백진의, 김주혁의 얼굴에 있었다.
김주혁은 해당 대사를, "김백진이 사건 너무의 사람을 보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좋은 대사"라고 했다. 이 드라마에는 김백진으 더 멋지게 보여주는 이른바 명대사들이 많다. 하지만 김주혁은 이 말을 최고로 꼽았다. 그건 배우 김주혁이 하나의 작품을 넘어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