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옥'
나현정(김혜수)은 범죄집단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키워낸 조직의 막후 실세다. 보스 김재철(최무성)은 자신과 조직을 위해 험한 삶을 살아온 현정을 안타깝게 생각해 어둠의 세계를 편히 떠나게 해주고, 현정 또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순탄하게 진행되던 은퇴 작업은 행동대장 임상훈(이선균)이 현정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삐걱대기 시작한다. 급기야 상훈은 현정에게 약점이 잡힌 검사 최대식(이희준)과 결탁해 조직 전체를 뒤흔들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현정을 비롯한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영화 '미옥'(감독 이안규)은 아마도 김혜수라는 배우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행 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김혜수는 앞서 '타짜'(2006) '도둑들'(2012) '차이나타운'(2015) 등 각종 범죄물에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렇게 착실히 쌓아온 경력을 통해 남성 장르로 여겨지는 누아르 영화 전면에 서도 어색하지 않은 흔치 않은 배우가 됐다. '미옥'에서 그는 역시나 기대 이상의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짧게 자른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총을 쏘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영화다. 그가 한국영화계의 보물같은 존재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미옥'은 정체가 누아르라는 걸 끊임 없이 강조하는 작품이다. 의미를 찾을 수 없이 길고 자극적인 오프닝 시퀀스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대 범죄 집단이 있고, 복수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부패한 공권력이 있다. 폭력·섹스·마약·총도 있다. 누아르 영화라고 하면 쉽게 떠올리는 온갖 설정들이 담겼고, 영화는 이 요소들을 강박적으로 나열하는 데만 공을 들인다. 그렇게 누아르처럼 보이는 것들에 방점을 찍어가는 사이 캐릭터와 이야기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러닝 타임 내내 스크린 위를 헤맨다.
'달콤한 인생'(2005) '범죄와의 전쟁'(2011) '신세계'(2012) 등 호평받은 한국 누아르는 대개 캐릭터가 강점인 작품이거나 특유의 장르 세계를 설득력 있게 구축하는 데 성공한 영화들이었다. 그러나 '미옥'은 두 가지 모두 놓친다. 더 큰 문제는 역시 캐릭터다. 특히 나현정은 관객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시종일관 수동적이고 평면적이다. 영화는 여배우가 주인공인 누아르 영화로 포장돼 있지만, 김혜수가 출연한 분량만 많을 뿐 '여성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면모는 모성애 외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건 배우의 실패가 아니라 연기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 연출의 실패로 봐야 한다.
김혜수·이선균·이희준은 각기 다른 장점으로 무장하고 우리 영화계에 나름의 지분을 갖는 데 성공한 '좋은' 배우들이다. 아마도 관객은 이 세 배우의 개성이 한 작품 안에서 어우러지는 순간의 쾌감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옥'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가장 진진해야 할 순간에 내뱉는 촌철살인식 대사가 대체로 허무하게 들린다면 이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