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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Jun 04. 2019

관성에서 나오려는 '봄밤'의 사람들

드라마 '봄밤'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

1. '봄밤' 3부작

김수영의 시 '봄밤'과 권여선의 소설 '봄밤'을 좋아한다. 최근 안판석과 김은이 만든 드라마 '봄밤'도 좋아하게 됐다. 드라마 '봄밤'은 동명의 시와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면서도 공통된 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시 '봄밤'의 구절에서 드라마 전반에 흐르느 기운 같은 게 느껴지고, 술과 연애는 소설 '봄밤'과 공유하는 것들이다. 


2. 뻔한 로맨스 드라마?

이정인(한지민)과 유지호(정해인)가 만나서 연애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로맨스 드라마다답게 두 사람에게는 쉽게 서로의 연인이 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 그런데 자꾸만 끌리고,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다. 줄거리만 보면 뻔한데, 실제로 이 드라마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나는 '봄밤'을 '관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다.

3. 어차피 할 결혼

정인은 기석(김준한)과 오래된 연인이다. 기석이 극중 04학번으로 나오니까, 또래인 이들은 아마도 사회 통념상 이제 결혼할 때가 됐다. 기석은 정인에게 "이제 결혼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둘 사이의 결혼을 이렇게 수식한다. "하긴 해야 할 결혼" 또는 "어차피 할 결혼". 이 말은 관성적으로 연애해 온 정인을 깨운다. 그리고 그때 지호를 알게 된다.


4. 일단 정지

정인이 기석과의 결혼을 망설이는 건 지호 때문이다. 그러나 지호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삶이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저 흘러만 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그건 말 그대로 정인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세상이 정한 기준일 뿐이니까. 결혼이 대표적이다. 정인에게 지호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건 흘러가버릴지도 모를 자신의 삶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5. 모두 멈춤

'일단 정지'에 해당하는 건 정인 뿐만이 아니다. 정인의 언니 서인도 이제 생각한대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기석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힘에 억눌려 살아왔지만, 정인을 지호에게 빼앗기게 될 상황이 오면 아마도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이다. 지호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씌워진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떨쳐내고 나가려 한다. 지호의 친구가 그랬다. "뭐 죄 지었냐."


6. 세 자매

정인에게는 언니 서인이 있고 동생 재인(주민경)이 있다. 언니는 아버지의 뜻대로 아나운서가 됐고,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한 것처럼 보인다. 정인은 아버지가 옳다고 믿는 결혼을 일단 거부하는 중이다. 막내 재인은 한 발 더 나아가 "미쳐야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제 세 자매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를 완전히 뒤집어 엎을 기세다. '봄밤'에는 명확한 페미니즘 메시지가 있다.

7. 정인

30대 여성 시청자가 가장 감정 이입할 대상은 역시 정인이다. 이제 모험을 하기엔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이 나이 또한 사회가 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저 안정적으로 지나가버릴 삶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런데 그 안정감을 쉽게 버리기는 힘들다. 동생 재인이 공시생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 사람을 왜 만나냐"고 말하는 게 바로 정인이라는 캐릭터다. 이중적이지만, 인간적이다.


8. 12회나 남았다

총 16회 중 4회까지만 방송된 상태여서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디로 향할지,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 이건 그냥 '짐작' 정도가 되겠다. 오랜만에 지켜볼 만한 드라마가 생겨서 좋다. 뭐랄까, 모든 캐릭터를 다 응원하게 된달까. 정인도 서인도 재인도 기석도 지호도. 이 드라마에 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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