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허무, 죽여버리면 되지

'버닝'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by 손정빈

코언 형제가 2007년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내놓은 뒤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영화 속 최악의 악당'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캐릭터가 됐다. 목표한 것을 향해 맹렬하고 집요하게 그러면서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전진해가는 시거에게는 인간 본연의 나약함 같은 게 없어 보이는데, 이는 그를 마주한 보통의 인간들이 짓는 당혹스러운 표정과 대조돼 공포감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시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동전 던지기는 시거의 존재를 상징한다. 동전을 던져 앞뒤를 맞히게 하고, 못 맞히면 죽인다. 이유는 없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그의 살인 행각에는 어떤 의미도 없으니 말하자면 이 무의미가 그의 원칙이다. 그래서 극중 해결사 '칼슨 웰스'(우리 해럴슨)는 시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그자를 감당 못 해…그와는 협상이 안 된다는 말이야. 특이한 자거든. 돈이나 마약을 뛰어넘는 원칙이 있어. 당신하곤 다르지. 물론 나도 못 쫓아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종반부에 나온다. 흡사 '무의미'를 몰고 다니는 사신(死神)과도 같았던 시거는 동전 던지기로 또 한 번 살인을 한 뒤 이동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교차로를 지나던 중 신호를 지키지 않은 정체불명의 차가 시거의 차를 들이받은 것. 무의미 그 자체로 보였던 그 또한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사고를 당한 뒤 당황한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고, 이번엔 시거가 '나쁜 운'의 무의미를 감당해야 할 차례였을 뿐이다.

새삼 11년 전 나온 영화를 떠올린 건 이창동의 '버닝'(2018)을 보고나서였다. 일단 요약하면 이렇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이창동의 새 영화는 1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진 한쌍의 작품처럼 보인다는 것. 코언 형제가 우리 삶 내부에 부유(浮遊)하는 '의미 없음'을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근심어린 얼굴로 탄식했다면, 이창동은 젊은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를 삶의 공허 속에서 헤매게 하다가 어떤 결단에 이르게 한다.


탄식과 결단,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한숨을 쉬는 것과 무기력 속에서도 행동하는 건 명백히 다른 행위인데 왜 한쌍이라고 하는가. 이 두 가지가 마치 질문과 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안관 벨은 그저 절망하고 있으니 이 지독한 무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건 당연하다. 종수는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이 허무를 겨냥해 발악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공허를 어째야 하는 겁니까." 코언 형제가 이렇게 묻자 이창동이 말한다. "그럼 그 공허를 죽여버리자."

'버닝'은 종수가 그의 고향 친구 '해미'(전종서)를,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벤'(스티븐 연)을 차례로 만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버닝'은 종수를 통해, 종수의 시각에서 해미와 벤을 바라보는 영화다. 이후 종수는 갑자기 사라진 해미의 행방을 쫓고, 동시에 해미의 실종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벤을 미행하며 관찰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보안관 벨이 시거와 시거가 추적하는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의 뒤를 밟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해미.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관해 말했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다. 해미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레이트 헝거라서다. 그러나 그녀는 삶의 의미를 어디서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해미는 종수에게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을 보여주며 말했다. "없다는 것을 잊어라." 인생에는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자 차라리 삶에 의미가 없다는 걸 잊자고 말한다.


해미는 춤을 춘다. 아프리카에서 배워왔다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다. 하늘을 향해 팔을 올리고 좌우로 흔든다. 그녀는 이 동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이라고. 해미와 벤이 종수의 집을 찾은 날, 벤이 음악을 틀자 해미가 윗옷을 벗고 춤을 춘다. 팔이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더니 이내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 된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애타게 찾는다. 삶이 무의미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잊기 위해 안간힘 쓴다. 음악이 멈추자 해미는 운다.

이제 벤.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다. 벤에 따르면, 이 행위에는 어떤 판단도 개입돼 있지 않다. 태워주길 기다리는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태울 뿐이고 여기에 옳고 그른 건 없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 얘기를 하고 나서 하루 혹은 이틀 뒤 종수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말하지만, 종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종수가 벤에게 매일 새벽 비닐하우스를 확인했다고 하자 벤은 답한다. "그래도 놓쳤네요." 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하고 해미가 춤을 춘 그날 직후 해미가 사라진다. 벤은 말했다.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종수는 해미가 없어진 일이 벤과 관계돼 있다고 여기고, 그를 미행한다. 벤에게서 단서가 나올리 없다. 벤의 삶은 텅 비어있다. 아무것도 없다. 부자이고 매너가 좋고 정상적인 친구와 가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종수는 벤을 알 수가 없다. 어디 그것 뿐인가. 해미를 찾아다닐수록 종수는 해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버닝'은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칼코마니가 된다. 시거가 뒤쫓는 모스는 시거와 사투를 벌인다. 모스는 시거에게 말한다. "원한다면 응해주지." 모스는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그 무의미(시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이건 흡사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삶의 의미를 갈구하던 해미다. 모스는 죽는다. 시거가 죽인 게 아니다. 멀쩡히 길을 가던 중에 예상치 못한 총격전에 휘말려 갑자기 죽어버린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 해미와 똑같이 말이다.


벤은 '버닝'의 시거다. 벤은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출 때(삶의 의미와 사투를 벌일 때) 비웃고 있었다. 종수는 벤을 미행하지만 그는 매번 종수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는 잡히지 않는 존재다. 보안관 벨이 시거가 다녀간 곳에 매번 뒤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벤은 해석이 되지 않는 존재다. 그는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기준도 없이 그저 거기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는데, 이 모습은 동전을 던져서 생사(生死)를 결정하던 시거의 바로 그 모습이다.


그렇다면 '버닝'의 종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벨인가. 종수(벨)가 해미(모스)와 벤(시거)의 행적을 쫓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유사해보인다고 할 수 있으나 두 사람은 명백히 다르다. 이 차이가 앞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질문이며, '버닝'은 그에 대한 답이라고 말한 이유가 될 것이다.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벨은 아내에게 아버지가 나온 꿈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는 무기력하다. 종수는 다르다. 벤을 불러내 죽여버린다. 그리고 태워버린다.


벤은 종수에게 "무슨 소설을 쓰냐"고 물었다. 종수는 말했다.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불가해한 세계, 수수께끼 같아서 이해가 되지 않는 세계를 마주한 종수의 선택은 해답을 찾는 게 아니라 수수께끼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버닐하우스를 태우거나, 동전을 던지는 것처럼 해석되는 일이 아니니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이 허무를 살해한다. 무의미의 상징인 벤을 죽이고 불태워서.

종수는 이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걸까.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종수가 저지른 또 하나의 살인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종수는 벤을 죽이기 전에 해미도 죽였다. 삶의 공허에 몸부림 치며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울었던 해미에게 종수는 말했다. "너 왜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옷을 잘 벗어. 창녀나 그렇게 옷을 벗는 거야." 인생의 허무를 자꾸만 깨닫게 하는 해미의 몸부림을 종수는 창녀와도 같은 것, 다시 말해 천박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 해미를 죽였다.


문제는 종수가 해미의 '텅 비어 있어서 슬프고 무기력한' 그 감정을 제거한 후에 느끼는 공포감이다. 종수가 본격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시점은 그가 해미에게 '창녀 발언'을 한 직후다. 해미는 증발하듯 사라졌고 벤은 유유자적인데, 종수는 이 두 사람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세계의 무의미의 일부를 없애버렸으나 오히려 그가 사는 세계는 더 이해할 수 없는 게 돼버린 것. 보안관 벨은 그 공포에 대해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놈은 섬뜩한 유령 같아요."


그런 종수는 벤까지 죽였다. 종수는, 종수가 사는 세계는, 괜찮은 걸까. 그가 벤을 칼로 찌를 때 벤의 표정은 묘하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벤은 종수를 힘껏 끌어안는 것처럼 보인다.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피 묻은 옷은 물론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불 속에 던져버린 종수는 알몸으로 차에 올라 살해 현장을 떠난다. 스스로 벗은 옷이지만, 발가벗겨진 듯하다. 종수는 무의미들을 죽여놓고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듯하다.


그래서 이창동이 코언 형제의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놨다는 것인가. 결국 이게 아닐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요? 글쎄요. 청년을 위한 나라도 없더군요." 이건 '버닝'이 청년 세대의 절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창동 또한 자신의 작품이 청년에 한정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정리하자. 노인이나 청년이나 인간 누구나 똑같이 이 세계의 불가해함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글) 손정빈


이전 04화사랑영화가 아니라 생명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