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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Jul 20. 2020

돌팔매를 맞아 제거한 부조리

영화 '박쥐'를 보고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나

2009년 4월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가 개봉했다. 소품같은 작품이었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건너뛰면 복수 3부작 이후 4년 만에 나온 박찬욱 영화였고, 배우 송강호와 함께했기에 무언가 대단한 게 나왔을 거라는 기대감이 컸다. 게다가 뱀파이어가 된 신부에 관한 영화라니. 부조리는 박찬욱 영화의 기둥이 아닌가. 그의 영화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넓어졌는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박쥐'는 끓어오른 기대감 만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는 것. 아마도 다수 관객은 '공동경비구역 JSA'나 '올드보이'의 재미를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박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의 기괴함을 더 적극적으로 이어받은 듯한 영화를 내놨다.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또 한 편의 걸작이 탄생했다고 추어올린 이들이 있었고, 최악의 박찬욱 영화라고 폄하한 이들이 있었다.


이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에 빨려들어가 정신못차리고 봤던 나는 상찬하는 쪽이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이 다를 수 있다데다가 신성함과 천박함이 뒤섞인 혼돈이 있고, 송강호·김옥빈·신하균·김해숙이 만든 앙상블을 목격했는데, 어떻게 지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때 난 '박쥐'를 깎아내리는 친구에게 이 작품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에 관해 한참을 열변하기도 했다.


모든 장면이 좋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정신을 가장 크게 흔들어놓은 건 끝 부분이었다. 살육이 있고난 후 상현(송강호)이 태주(김옥빈)를 차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 이후였다. 그는 차를 몰아 두 장소에 간다. 먼저 가는 곳은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수도원 앞이고, 그 다음에 가는 곳은 최종 목적지인 바다다. 상현은 첫 번째 장소에서 강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두 번째 장소에선 자신을 시커멓게 태운다.


내가 상현의 이 경로를 잊을 수 없는 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어서다. 그는 누구인가. 신부인 이 남자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고 할 수 있는 게 기도 외엔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이제부터는 겨우 기도 따위가 아닌 내 몸을 직접 던져 사람을 구하겠다고 다짐한 뒤 급기야 아프리카에서 진행 중인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바이러스와 관련한 실험에 자기 몸을 희생해 죽을 시간을 기다리던 순교자였다.

순교했다면 행복했겠지만, 상현은 죽지 않고 부활한다. 그것도 뱀파이어가 돼서. 나의 욕망을 철저히 통제한 채 오직 다른 이의 고통에 슬퍼하며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살았던 그는, 다시 태어나 이전의 삶과는 반대로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다. 상현은 이제 살아서 불행하다. 정신은 신부인데 몸은 뱀파이어라고 해야 하나. 그럼 그는 무엇인가. 신부인가, 뱀파이어인가. 상현은 쥐인지 새인지 알 수 없는 박쥐가 됐다.


남을 위해 피를 토하던 그는 이제 자신을 위해 다른 이의 피를 빤다. 간음하고 살인한다. 그는 뱀파이어일 뿐 더는 신부가 아니다. 문제는 예수처럼 부활한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안으로 썩어문드러졌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신성한 이 부조리를 도저히 견딜 수 없기에 그는 이제 결단을 내리려 한다. 그래서 차를 몰아 추종자들이 모여 사는 수도원 앞 캠핑장으로 간다.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상현은 왜 느닷없이 젊은 여성 추종자를 강간하려 하는가. 이와 함께 회자된 게 송강호의 성기 노출이었는데, 성폭행 시도는 그렇다쳐도 꼭 성기를 노출한 장면이 필요한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도한 연출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상현이 바지를 다리에 걸친 채 성기를 내보이며 텐트 밖으로 걸어나올 때 그 행동을 지지했다.


상현의 최종 목적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이 몸뚱이를 세계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빛이 닿으면 몸이 불타버리는 뱀파이어라서 그는 해가 뜨는 바다로 간다. 그러나 이렇게 나를 죽여버리면 그걸로 끝이란 말인가. 그저 사라지기만 해서는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도들에게 뱀파이어 상현은 계속 하나님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을까. 경찰이 그의 살인 행각을 밝혀내더라도 신도들이 '우리 신부님이 그랬을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는 그런 상황.


그래서 그는 강간을 시도하고, 적발된다. 바지를 다리에 걸친 채 성기를 내보여 가장 추한 모습으로 그의 추종자들에 앞에 선다. 그리고나서 돌팔매질 당한다. 상현은 그렇게 성인(聖人)에서 인간 쓰레기가 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의 피를 마시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더이상 인간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자신의 추악을 내보이며 이같은 사실을 공표한다. 그렇게 죽어마땅한 인간이 돼야 그는 죽을 수 있다. 아무도 그를 찾지도 떠올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론 상현은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선택을 하고, 그가 맞닥뜨린 운명과 그가 저지른 일들에 책임을 졌다. 그의 살인은 어차피 목격자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간 미수 사건에 더해 상현에 대한 평가는 명확해질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산 채로 화장해버린다. 그는 쉽게 죽어선 안 된다. 상현 내부의 어둠은 빛에 의해 불타버려야 한다. 나는 이런 '박쥐'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충분히 추해서 잊지 못한다.


개봉한지 11년 된 영화를 최근 떠올린 건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성 인권의 상징이었던 그는 전 비서에게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사건 사이에 인관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것이다. 박 시장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장례는 성대하게 끝났다. 아마 이것이 상현이 자신이 죽은 뒤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런 일이었을 것이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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