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워터스에 관하여'
실화를 기반한 영화에는 각색이 있다. 실제 이야기에 극적인 재미를 넣기 위해 어떤 사실은 과장하고, 다른 어떤 사실은 축소하며, 확인되지 않았으나 추측해볼 만한 내용은 덧붙인다. 기록은 그렇게 영화가 된다. 이런 작품들엔 각색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으나 그래도 사실 그대로 남아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건 역시 결론이다. '폭스캐쳐'에서 존 듀폰이 데이브 슐츠를 살해했다는 게 바뀔 수 없고,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남았다는 게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관계를 왜곡하면 애초에 실화를 영화화한 게 아닌 게 될 것이다. 변호사 롭 빌럿이 1998년 세계 최대 화학 회사 듀폰을 상대로 시작한 독성 폐기물 유출 관련 소송을 2017년 승리로 이끌었다는 영화 '다크 워터스'(감독 토드 헤인즈)의 결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크 워터스'가 선택한 이 사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끝이 정해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듀폰 소송전'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듀폰사(社)가 독성 폐기물 피해자들에게 약 8000억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급하게 된 경위를 알기 위해 이미 나와 있는 관련 기사나 자료가 아닌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있어야 이 작품은 의미를 갖게 된다. 진실을 파헤치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역시 가장 쉬운 방법은 주인공인 빌럿(마크 러팔로)의 활약을 조명하며 정의 실현을 위해 그가 얼마나 영웅적인 행동을 했는지, 그 과정을 최대한 흥미진진하게 각색하는 방식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 역시 이 정공법을 버릴 생각이 없다. 당연히 '다크 워터스'는 빌럿이 영웅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가 왜 그렇게 불리는지에 관해서는 이전에 나온 숱한 '변호사 영화'와는 다른 이유를 댄다.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건 시간이다. 이 소송전의 모든 게 시간과 싸움이다. 시작은 듀폰사가 빌럿에게 보내온, 사무실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서류를 일일이 검토하는 일이다. 집단 소송에 참여할 피해자를 한 명 한 명 설득하고 그들의 피해 정도를 파악하는 일도 모두 시간이다. 듀폰사가 어떤 독성 화학 물질을 사용했는지 밝히는 것도, 그 독성 물질과 건강 악화의 인과 관계를 실험해서 확인하는 일도 모두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인과 관계가 사실로 확인된 후 진행되는 피해 보상 재판이 끝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또 어떠한가. 그 세월에 빌럿은 늙고 병들었으며, 갓난아기였던 빌럿의 아이들은 어느새 다 커버렸고, 남편을 지지하던 아내는 지치기도 했다. 어떤 피해자는 건강이 더 악화돼 걷지 못하고, 또 어떤 피해자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래도 빌럿은 이 싸움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다크 워터스'는 소송을 다루는 영화가 의례 그러하듯이 법정 싸움을 벌이는 양측 공방을 스펙터클 하게 과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재판 과정이 담긴 장면도 매우 짧다. 상대를 음해하기 위한 작전 같은 것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빌럿은 변호사가 주인공인 작품이 자주 내세우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임기응변에 능한 달변가 캐릭터도 아니다. 헤인즈 감독은 이런 통속적인 각색 대신에 빌럿이 진실을 건져 올려 끝내 정의를 실현해내기까지 걸린 20년이라는 세월을 담을 뿐이다. 빌럿은 승소해서가 아니라 그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냈기에 영웅으로 격상한다. 그는 그저 포기하지 않고 일한다. 좋은 각색은 단순히 실화를 얼마나 더 드라마틱하게 바꿔놓느냐가 아니라 실화 중 어떤 부분에 집중할 것인가, 이것 하나로 결정되기도 한다. '다크 워터스'가 정확히 그런 사례다.
헤인즈 감독은 아마도 정의(正義)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관객이 시간으로 절감하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캐롤'(2016) '아임 낫 데어'(2008) '벨벳 골드마인'(1999) 등 전작에서 보여준 감각적 촬영과 화려한 이미지, 과감한 설정 같은 게 이 영화엔 없다. 당연하다. '다크 워터스'는 정의가 전격적으로 승리할 때 관객이 느낄 쾌감을 휘갈기지 않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와 견뎌내야 할 시간을 조용히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라 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지만 그 빛을 존재하게 하는 것 자체가 고단한 일이며, 심지어 밤은 생각보다 너무 길다. 마크 러팔로는 존 듀폰 살인 사건을 다룬 '폭스캐쳐'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들을 그린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했다. 이번엔 듀폰사가 저지른 만행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았으니 참 공교롭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