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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l 23. 2021

[톰보이] 여자다운 게 뭔데?

여자답기보다, 남자답기보다 나답게



나는 여자로 태어났다. 내 생물학적 정보와 나의 주민번호 뒷자리의 첫 번째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이 외의 방식으로 내가 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해야 될 필요는 없다. 때문에 누군가 나의 겉모습만 보고서 내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어한다면 나는 여자라고 말해주면 그만이다. 혹은, ‘네가 알아서 뭐하게’라는 심정으로 그냥 무시하거나. 인간으로 태어난 마당에 동물처럼 생식기를 드러내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이건 내가 남자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의 성별을 누군가에게 검증받기 위한 노력은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 사람들, 또는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친 이 사회는 이러한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기억에도 없는 유아 시절 찍은 사진들을 보면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핀을 꽂은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내 쪽에서 바지를 고집했지만, 내 고집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부터, 편견 없이 아직 뇌가 말랑말랑하던 시절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뒤따랐다.


‘너는 무슨 여자 애가 그렇게 칠칠치 못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자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품행이 단정하고 바르다는 의미이려나.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좀 우악스럽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게 자연스럽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나랑 다르게 예나 지금이나 얌전하고 조용한 나의 남동생은 남자답지 못한 걸까. ‘여성스럽지 못한’ 어린 나에게 화살처럼 날아오던 의아한 말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시집가려면 집안일 연습도 해야지.’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강산이 거의 두 번은 바뀌었는데도 아직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때 듣기에도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누구나 결혼은 해야 된다는 생각은, 그 말을 했던 친척 어른 세대에게는 어느 정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 내가 집안일을 연습해야 된다는 말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말을 들을 당시 옆에 있던 나의 남동생은 집안일과 친해지라는 말 따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이 외에도 성별을 기반해 들었던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디 윗세대 어른들 뿐일까. 같은 또래들도 여자는 어쩌고, 남자는 어쩌고, 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고정관념은 물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나로서는 이와 같은 말들이 의문스러웠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나와는 억만 광년쯤 거리가 먼 모습들을 당연하게 기대하다니.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좀 특이하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이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나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했었다.



•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귀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카락에, 파란색과 축구를 좋아하며, 동네 여자 친구 리사에게 반한 미카엘. 미카엘의 가족이 새로 이사를 온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아무런 의심 없이 남자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미카엘의 진짜 이름은 로레, 여자 아이이다. 여동생 잔느는  로레의 거짓말의 귀여운 공범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 잔느를 괴롭힌 남자아이와 싸움이 붙고, ‘남자답게’ 싸움에서 승리한 로레. 하지만 싸웠던 상대 아이의 어머니가 상황을 알리기 위해 집에 찾아오고, 로레는 그동안 남자아이인 척 동네 사람들을 속여 온 일을 들키고 만다. 이후 로레의 어머니는 그에게 원피스를 입힌 채 싸움을 했던 남자아이의 집에 찾아가 사과를 시킨 것은 물론, 입맞춤까지 나눈 리사에게 찾아가 사실은 여자 아이임을 밝히게 만든다.


로레(짧은 머리)와 동생 잔느(긴 머리)


누군가에게는 영화 ‘톰보이’ 속 로레가 그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은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 결국에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갔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로레는 다르게 느껴진다. 사회에서 강요한 성별 고정관념과 성역할로 인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은, 주변 사람들은 속였을지언정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했던 아이로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 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의 운동은 달랐다. 여자 아이들은 피구, 남자아이들은 축구. 아마 다른 학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피구는 꽤 폭력적이었다. 상대 팀 선수를 공으로 맞히는 것이 점수를 얻는 방식이라니. 바로 그 룰 때문에 머리를 맞거나, 다치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몸을 크게 쓸 수도 없는 좁은 네모 칸 안에서 다 같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도망가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공포스럽다.


이렇게 여자 아이들이 겁에 질리거나, 혹은 숨겨둔 공격성을 드러내며 피구를 할 때,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했다. 단체 스포츠를 하다 보면 으레 그렇듯 축구를 하던 아이들도 분에 못 이겨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이 있겠지만, 피구와 달리 폭력이 축구의 룰 그 자체는 아니다. 상대 팀 선수를 공으로 맞히는 대신, 무생물인 골대에 공을 넣는다. 피구가 선수 한 명을 맞힐 때마다 상대 팀의 점수가 하나씩 깎이며 마침내 0이 되어서야 끝난다면, 축구는 0에서 시작해 골을 넣을 때마다 점수가 올라간다. 경기가 끝나고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성취감을 배웠을지 묻는다면, 그 답은 뻔하다.


로레(짧은 머리)와 그가 좋아하는 리사(긴 머리)


중학교에 올라가니,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을 독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협동심을 기르고 성취감을 맛보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화장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가지도, 그렇다고 화장을 하지도 않았지만 결국에는 여자 아이들과 어떻게든 어울리기를 선택했다. 굳이 튀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10대 시절의 나에게는 또래와 잘 어울리는 것이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한참 어른들에게 여자라서, 남자라서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이 어딨느냐며 일일이 따지고 들던 나는 오히려 또래 친구들 앞에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른들에게 배운 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여자 역할, 남자 역할을 수행하는 친구들의 행동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어른들이 내게 주입하고자 했던 여성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옳지 않다는 걸 마침내 깨닫기까지, 크고 작은 기회들을 얼마나 놓쳤을지 떠올리면 입맛이 쓰다.



• 이제는 나다워져야 할 때


살면서 성격이 여성스럽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나는 자연스레 턱 없이 부족한 내면의 여성성을 겉모습을 통해 매우려 했다. 그렇게 애쓴 덕분일까. 비록 성격은 여전히 수더분했으나 어느 순간 스스로 코스메틱 덕후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웬만한 뷰티 브랜드의 이름을 다 꿰게 되었고, 신상이 나오거든 그 누구보다 먼저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로 달려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꾼 건 물론이다.


하지만 외적으로 여성스러워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대학 동아리 시절부터 직장인 기간 동안,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 나에게 무슨 안 좋은 일 있냐부터 시작해 갖가지 표정 지적이 뒤따르곤 했다. 정작 내 옆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 동이리원에게는 아무도 표정으로 간섭하지 않았으며, 나에게 너무 웃지 않는다며 꼬투리 잡던 거래처 남자 직원이야 말로 전혀 웃는 상은 아니었다. 나의 이런 경험들과, 방송 중에 잠깐 무표정이었단 이유로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던 여자 연예인들의 상황의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사람들은 여자의 미소 띤 얼굴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여자’가 되기 위해, 좀 더 정확히는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카락 길이는 최소한 턱에서 한 뼘 이상 유지하고, 어디를 가든 기초화장은 필수이며, 너무 펑퍼짐한 옷보다는 적당히 피트 된 옷을 입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상냥한 미소 지으며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자질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노력’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특성들이 여성의 천성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이상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자임을 깨달은 지금, 그동안의 눈물 나는 노력을 모두 멈추었다. 그 뒤로 이어진 주변 사람들의 반응들은, 내가 사회적 여성성을 체화하던 시절 듣던 말들과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겉모습과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듯 느껴졌다.


나의 변화에 가장 거부 반응을 보였던 건 단연 전 남자 친구였다. 그런 그는 다른 남자들보다도 머리카락이 짧았고, 일평생 립스틱이나 하이힐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여성성을 버려가는 나에게 걱정을 빙자한 오지랖들이 뒤따랐지만, 나는 여성스럽기보다 나다워지기로 한 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영화 '톰보이'의 한 장면


반대로 남자로 태어나서 사회적 남성성을 억지로 수행해온 남자들도 을 것이다. 여자가 미소 지어야 할 때, 남자라는 이유로 울음을 터뜨린 순간 조롱을 받고, 실은 누나의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은데 당연하다는 듯이 품에는 로봇과 장난감 자동차가 안겨 있었으리라. 여자 친구들처럼 화장을 하고 힐을 신고 싶어도 변태로 낙인찍힐까 봐 엄두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모습들은 알파 메일의 자질과는 한참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은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다. 이제라도 다들 본인의 생물학적 성별에 부여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나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서로에게 좀 더 관대해지길 바란다. 나다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순간, 더 큰 가능성이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6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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