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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y 27. 2022

[올란도]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바뀐 것은 오직 그의 성별뿐






어떤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듣거나 확인했을 때 분명 그에 따라 기대하는 이미지와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한창 공부하느라 바쁘겠다 짐작하고, 특정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요리를 잘하겠다든지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체격이 좋거나 날쌘 사람을 보면 운동을 잘하고 좋아할 것이라 추측하는 식이다. 전공에 따른 일차원적인 기대와 요구들은 전부 나열하기에는 너무나 많아 입과 손 모두 아플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양이는 조금 더 얌전하고 독립적이며, 개들은 상대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복종하는 편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처럼 무언가 한 사람, 혹은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들었을 때 상대방은 특정 범위 내의 반응이나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렇게 누군가를 이루고 있는 조건들 중 가장 견고한 편견으로서 작용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성별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어때야 하고, 남자는 어때야 한다 같은 편견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얼마나 만연하고 견고한 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이제 피곤한 지경에 이르렀다. 대신 성별 고정관념이 분야 상관없이 얼마나 큰 존재감을 자랑하는지, 내가 한때 구독했던 고양이 유튜버를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묘 가정이었던 해당 유튜버의 암컷 고양이 중 한 마리는 유난히 조심성이 많은 편이었다. 어느 날 그 유튜버가 동생이 기르는 암컷 고양이를 잠시 돌봐주게 되었고, 그렇게 두 암컷 고양이들은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올린 영상들에서 비교적 얌전하고 예민해 보이던 유튜버의 고양이는 낯선 고양이의 방문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를 본 유튜버는 아무래도 같은 암컷이라 경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처음 보는 고양이의 등장에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본능적으로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본능이라는 것은 성별이 아닌 고양이라는 종 차원의 문제이다. 더구나 내가 유튜브에서 보았던 고양이들 대부분이 이미 중성화 수술을 받은 뒤라는 것을 감안하면 성별 구분 자체가 의미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마 해당 유튜버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와 같은 평소 인간 여성에게 품고 있던 편견을 반사적으로 동물 암컷에게까지 적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그’가 ‘그녀’가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총애를 받는 아름다운 귀족 남성 올란도. 여왕은 그에게 영원히 시들지도, 죽지도 말라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런 여왕의 말처럼 올란도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400년의 세월을 살아간다. 여왕과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난 어느 날,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둔 올란도는 러시아 대사의 딸 샤샤에게 반해 모든 걸 버리고 사랑의 도피까지 각오하지만 결국 실연을 당한다. 이후 며칠간 죽은 듯 잠들었다 깨어난 올란도는 여자를 멀리하며 시에 푹 빠져 지내다 유명한 시인 닉 그린을 초대한다. 그러나 귀족에 대한 닉의 비판과 조롱에 낙담한 올란도는 결국 시 마저 포기하고, 이후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 영국 대사로서 터키와의 우호적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해 귀족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하필 터키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전쟁의 참혹함에 회의를 느낀 그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잠에서 깨어난 올란도는 더 이상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올란도'의 장면들


영국으로 돌아와 사교계에 나선 올란도는 그곳에서 남성들의 불합리하고 성차별적인, 아마 한때는 그 역시 공유했을 사상을 마주한다. 게다가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동안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다. 여성으로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뿐이지만 그는 남자와 결혼하는 대신 자유를 택한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던 올란도는 우연히 자유주의자 쉘머딘을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올란도는 이번에도 쉘머딘, 즉 남성과의 안정적인 삶을 택하는 대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를 떠난다. 또다시 긴 시간이 흐르고, 홀로 딸을 키우고 글을 쓰며 살아가던 올란도는 딸과 함께 오래전 자신이 살던 영국의 저택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더는 주어진 운명에 얽매여 있지 않는 스스로를 깨닫고 마침내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올란도'의 장면들



• 결국 세상은 변한다


아쉽게도 영화를 접하기 전에는 원작인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 ‘올란도를 읽기 전이었다. 아마 ‘댈러웨이 부인’이 그랬듯 영화 ‘올란도’를 감상하기 전 책을 먼저 접했다면 작품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했으리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화로만 놓고 보았을 때 ‘댈러웨이 부인’보다는 ‘올란도’ 쪽이 더 이해가 쉬웠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었을 뿐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에게는 큰 변화가 없었다. 즉 그에게 기대되고 주어진 근본적인 역할과 위치는 그대로라는 의미이다. 그저 아직은 상대적으로 좀 더 많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는 미혼인 상태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가야 하는 기혼인 상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비록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한들 젊은 시절의 클라리스가 앞으로 수행하도록 요구되는 위치는 결국 결혼 후 그가 살게 되는 삶과 다르지 않다. 클라리스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에게 요구됐던 길 옆에는 남들의 비난과 반감을 감수해야 하는, 좁고 어둡지만 자유로운 길 하나가 조용히 옆에 놓여 있을 뿐이었으니 그의 선택을 비난하긴 힘들다.


반면 조금은 판타지스러운 작품 ‘올란도’의 주인공은 갑자기 성별이 바뀌어 버린다. 이러한 단순하지만 분명한 장치 덕분에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좀 더 직접적으로 읽힌다. 지금보다도 훨씬 보수적이고 꽉 막혀 있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남성으로서의 올란도는 못 할 것이 없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얼마든지 큰 업적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된 그가 기대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어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가정을 꾸리는 일뿐이다. 남성으로서 살아온 올란도이기에 주체적이고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남성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그러한 태도는 여성인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 진취적이고 야심 넘치는 태도 뒤에 따르는 모든 보상 역시도. 애초에 평생을 여성으로서 살았다면 모를까, 갑자기 박탈당한 특권으로 인해 올란도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성별이 바뀌어 버리는 극적인 설정 덕분에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만 당연한 줄도 모르고 누리는 특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기는커녕 그런 특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깊이 와닿는다.


나에게 있어 ‘댈러웨이 부인’은 아름답지만 비극적이고, ‘올란도’는 치열하지만 낙관적이다. 댈러웨이 부인 역시 나름대로는 새로운 희망과 의미 같은 것을 발견했지 모르지만, 절은 시절의 클라리사 시절부터 댈러웨이 부인이 되기까지 그동안의 삶과 가치관을 통째로 뒤흔들만한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그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들지 않는다. 그러나 올란도는 무려 40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마침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시간대에 도달했다. 이 400여 년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를 고려하면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올란도의 인생에는 당연히 더 많은 선택권과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냥 유쾌하게 볼 수는 없던 이 영화의 엔딩만큼 행복한 결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긴 세월 동안 올란도가 여성으로서 어떻게든 온전한 자기만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견뎌왔을 지난한 과정과 마주했을 좌절들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엔딩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완벽한 보상일 것이다.


영화 '올란도'의 장면들


400년 전의 사회보다 지금이 여러 면에서 훨씬 더 진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놓고 누군가의 생득 조건을 기준으로 차별을 하는 것은 본인의 체면 때문이든 윤리적 이유 때문이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긴 세월을 버텨온 차별이라는 개념은 몸집을 다소 줄이고, 색만 더 옅어졌을 뿐 여전히 깊숙이 교묘히 뿌리내리고 있다. 전통과 사회 질서 유지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그저 가지를 살짝 치고, 잎을 좀 떨구었을 뿐 뿌리를 뽑아 버리려는 근본적인 시도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하지만 정의로운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 거대한 기둥을 들이받기 마련이고,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 존재해 왔기에 굵고 단단한 뿌리가 서서히 흔들려 지금처럼 최소한 타고난 조건으로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것만은 불가능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진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올란도처럼 쉽지 않은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한들 결국에는 영화와 같은 희망찬 결말을 맞이하리라 믿는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3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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