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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04. 2022

[그랜마] 낙태, 그리고 할머니

너무도 안 어울리는 두 이름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유쾌함






영화 ‘그랜마’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인기 코미디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주연 배우인 릴리 톰린의 매력에 빠져 그의 필모를 검색해 보다 마침 발견한 영화가 ‘그랜마’였다. 왓챠 페이지 상에서 나의 예상 평점이 무려 5점 만점에 5점으로 뜨기에 대략적인 줄거리조차 찾아보지 않고 무작정 감상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할머니와의 유대가 유독 깊은 나로서는 반갑게도 무려 할머니와 손녀 사이의 이야기였고, 더욱 흥미롭게도 낙태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할머니와 낙태라니. 아무래도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조합이다. 할머니라고 하면 보통 손주에게 아무리 밥을 먹여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모님보다 관대한 한편 어떤 면에선 더한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이다. 낙태의 경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과 그의 선택을 비난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개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와 낙태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위와 같은 묘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영화 '그랜마'의 주인공 엘


그런데 영화 ‘그랜마’는 이러한 편견 혹은 보편성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일단 가죽 재킷에 선글라스를 멋스럽게 소화하는 주인공 엘은 누가 봐도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할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다. 차림새뿐만이 아니다. 그는 남편이 아닌 부인과 사별한 레즈비언인 데다가, 흔히 말하는 꼰대 기질은 제로에 가깝다. 오히려 젊은 꼰대들에게 저 할머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며 한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입이다. 엘의 인생에서의 우여곡절 역시 우리네 할머니들이 흔히 겪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데, 이는 단순히 그가 서양 할머니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엘이 손녀를 데리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닌다. 그것도 손녀의 낙태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현실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전개는 할머니가 어떻게든 손녀를 임신시킨 남자를 찾아내 둘을 결혼시키는 모습이다. 일단 그전에 손녀는 할머니가 아닌 부모님에게 먼저 사정을 고백했을 가능성이 좀 더 클 것이다.



• 심각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낙태 이야기


여자 친구와 갓 헤어진 레즈비언 엘. 그런 그의 집에 아침부터 손녀 세이지가 들이닥친다. 무작정 할머니의 집에 찾아온 손녀는 현금 600 달러가 빌려달라고 말한다. 세이지가 그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낙태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은 세상을 떠난 자신의 배우자 바이올렛의 병원비를 갚느라 당장 손녀에게 쥐어줄 돈이 없다. 그렇다고 세이지가 본인의 어머니(엘에게는 딸)가 아닌 자신까지 찾아온 상황에서 손녀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 결국 엘은 차를 끌고서 손녀를 데리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기 시작한다.


손녀 세이지와 엘


그냥 돈을 빌리는 일조차 쉽지 않을진대, 엘과 세이지에게는 이 과정이 더욱 험난하다. 가장 먼저 찾아 간 세이지의 남자 친구 캠은 낙태 비용을 구해 놓기로 했음에도 본인의 애인 줄 어떻게 아냐면서 이제 와서 돈을 주지 않으려 든다. 엘의 활약(?) 덕분에 캠에게서 적은 금액이나마 받아내지만 이후 이루어지지는 만남들 역시 전혀 만만치 않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찾아간, 49년 전 엘이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시기 만나다 헤어진 전 남편 칼은 아직도 옛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는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키스를 요구한다. 기껏 원하는 대로 해주었건만 자신의 돈이 어디에 쓰일지 알게 된 칼은 그런 데 돈을 줄 수 없다며 막판에 말을 바꾼다. 이렇게 손녀 세이지의 낙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면서 엘은 오랫동안 묵혀둔 자신의 상처들을 마주하게 된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세이지의 남자친구 - 엘의 전남편 - 엘의 친구 - 엘의 전 여자친구


영화 ‘그랜마’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할머니 엘이다. 평생을 남의 의견 따위 관심도 두지 않고 살아온 듯한 그가 절절매며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은 흔한 말로 ‘웃프다’. 쉽게 쿨하다고도 한심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할머니 엘이 손녀 세이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낙태’란,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시라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다. 이 낙태라는 행위를 두고 할머니 엘과 손녀 세이지 모두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인물이 그들에게 무거운 감정을 주입하려 들지만, 두 주인공은 결심이 흔들린다거나 마음이 불편해지기는커녕 성가시고 귀찮아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낙태는 살인이라고. 그렇다면 임산부를 폭행해 유산시킨 이들에게 왜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을까. 법적으로 태아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임산부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는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낙태는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법과는 무관한 이러한 주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인지 초등학교 시절 성교육 시간,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태아의 영상을 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게다가 어린아이들에게 트라우마까지 안겨 줄 수 있는 영상을 교육이랍시고 보여준 이들의 폭력적인 발상에 화가 난다. 그렇게 ‘새’ 생명이 중요해서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노출된 폭력이나, 미/비혼모를 비롯한 한부모 가정의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다 못해 쉽게 비난까지 하는 것인가 궁금하다.


결국 낙태에 이처럼 죄의식을 덧씌우는 것은 그저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 ‘그랜마’는 낙태에 대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선을 완전히 거두어 냈다. 이미 본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 와중에 임신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마주친 한 여성과 같은 경험을 한 윗 세대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이다. (감독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꽤 놀랍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태아에 대한 감상적인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죄책감을 느낄 시간에 눈앞의 실수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과장된 감정적 호소가 배제된 덕분에 영화 ‘그랜마’는 다루고 있는 소재와 상관없이 그저 썩 괜찮은 로드 무비이자 가족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왼쪽부터) 할머니 엘 - 딸 주디 - 손녀 세이지



• ‘그랜마’의 힙한 할머니, 그리고 나의 할머니


영화의 주인공이 할머니인 때문일까. 낙태라는 중심 소재를 떠나 할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그랜마’의 할머니 엘은 좋게 말하면 굉장히 쿨하고 힙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다소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의 할머니는 어떠한가. 부모님 두 분 모두 내가 어렸을 적부터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기에 나와 남동생은 거의 할머니 손에 컸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지점부터 나의 할머니는 ‘그랜마’의 할머니와는 천지차이다. 동성 간의 사랑 같은 건 아마 상상도 해보지 않으셨을 테고, 요즘엔 틈만 나면 나와 남동생에게 증손주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어필하신다. 평생을 본인의 남편이자 나의 할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살아왔으며,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품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자아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누려 보지 못한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해 짙은 아쉬움을 느끼고 계신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도 마음도 복잡해진다. 나의 할머니가 ‘그랜마’의 엘과 같았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주변 사람들의 온갖 오지랖과 힐난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할머니의 성격이나 성 정체성과 관계없이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을 것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본인의 욕구에 대해 들여다보고 이를 요구할 기회를 누려 보지 못한 할머니가 문득문득 안타까워진다. 할머니의 삶과 생각을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런 마음을 품고 판단하는 것은 오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다음 생에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할머니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절대 두 번은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소망을 이야기하는 할머니에게는 다시 태어나면 꼭 그런 인생을 누리시라고 답하게 된다.


평생을 본인의 욕심이나 바람은 뒤로 한 채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어떠한지 상상할 수 없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그런 건 없다고 말할 때의 심정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나의 할머니로 인해 가끔은 문득문득 화가 난다.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 쉽게 말씀 못하는 할머니에게서,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크고 작은 기회를 앗아 갔을 모든 이들에게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역시 할머니의 자유와 기회를 갉아먹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그리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원망의 근간은 아마도 죄책감일 것이다. 나의 할머니도 ‘그랜마’의 엘처럼 주변 인들에게는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지언정 본인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고, 이 또한 건방진 소리이다. 그래도 한 번 바라본다. 그의 여생만큼은 충분히 이기적이기를, 정말 다음 생 같은 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아쉬움은 남지 않기를.


영화 '그랜마'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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