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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Apr 29. 2022

[크루엘라] 마침내 무대 중앙으로 나선 매력적인 빌런

그리고 분명한 한계






‘백설공주’의 이블 퀸, ‘인어공주’의 우르술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말레피센트, ‘라푼젤’의 고델, ‘알라딘’의 자파, ‘라이온 킹’의 스카 등. 개인적으로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인공과 대립하는 이블 퀸이나 고델은 호감이 덜 가지만 확실히 디즈니의 빌런들은 모두 존재감이 뚜렷하고 매력적이다. 엄밀히 말해 빌런들은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아니다. 보는 이의 취향에 따라, 각 빌런의 특성이나 악행의 이유에 따라 인기를 끄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확률적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애정은 받는 쪽은 아무래도 빌런들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 쪽이다.


이처럼 빌런들은 영화의 구조 상 본인의 엄청난 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는 위치에 처해 있다. 그러다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실사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그중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악당이었던 말레피센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등장했다. 제목부터가 '말레피센트'인 이 영화는 빌런이 주인공인 데다 대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주인공을 맡아,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나 스토리가 웬만큼 부실하지 않고서야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그리고 원래는 순수했던 말레피센트가 왜 못 되게 변할 수 밖 없었는지에 대한 그럴싸한 스토리까지 선보인 덕분에 '다른 각도로 빌런 관찰하기'의 재미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2편은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바람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다.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


그러던 중 또 다른 빌런이 실사 영화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으니, 바로 ‘101마리 달마시안’의 크루엘라다. 이번 역시 말레피센트처럼 악당인 크루엘라의 이름을 제목 전면에 내세워 호기심을 자극했다.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다른 악당들에 비해 크루엘라는 실사 영화 제작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 비호감에 가까운 생김새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그 이름은 잊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엠마 스톤이 완벽하게 분한 크루엘라의 비주얼을 확인한 순간 크루엘라라는 이름과 존재감은 쉽게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개봉한 디즈니 실사 영화 중 나의 ‘최애’ 영화에 등극했다.



• 원래부터 뛰어나고, 못됐으며, 약간 돌아 있는


육아 난이도 최상 중의 최상, 적당히 어른들의 말을 듣고 착하게 행동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는 에스텔라. 이런 사고 저런 사고를 치던 끝에 그는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 어머니와 단둘이 런던으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런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도와줄 이가 있다면서 에스텔라를 한 대저택으로 데리고 간다.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당연히 가볍게 묵살하고, 어김없이 말썽을 부린 후 달마시안 개들에게 쫓기고 있던 에스텔라. 개들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다 넘어지고,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은 순간 그는 자신을 뒤쫓는 줄 알았던 개들이 어머니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대로 에스텔라의 어머니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만다.


어린 시절의 크루엘라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에스텔라는 앞으로 평생의 동지가 될 재스퍼와 호레이스와 우연히 만난다. 그렇게 에스텔라는 새로운 가족을 꾸려 두 친구와 단란하게(?) 도둑질을 이어가던 중, 재스퍼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리버티 백화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드디어 리버티 백화점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펼치게 될 줄 알았건만, 그는 하루 종일 청소만 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크루엘라는 런던 패션계의 거물 남작 부인의 눈에 띄게 되고, 그의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서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기대한 바로 그 순간, 에스텔라는 남작 부인의 정체를 깨닫는다. 어머니를 위해 어떻게든 착하게 살려던 에스텔라는 그렇게 죽고, 독하고 잔인한(cruel) 새로운 자아가 깨어난다.


런던 패션계의 거물 남작 부인 / 남작 부인의 브랜드에서 일하게 된 에스텔라



• 외모 변신, 여성 빌런 각성의 필수 과정?


범죄자나 그 외 나쁜 이들이 저지른 악행과 불편한 상황들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그런 사람이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낄 필요도 없고, 전문가들도 따로 있기에 굳이 관심을 둘 이유도 없지만 영화 속 악당들은 예외이다. 비단 빌런이 아니더라도 주요 인물들의 속사정이나 뒷이야기는 자세히 알면 알수록 더 정이 가고 매력이 느껴진다. 그런 만큼 악당들에게, 막연히 나쁜 X인 줄로만 알았던 그들에게 나름의 서사가 있고 그게 꽤 그럴싸하다면 오히려 주인공보다 더 호감을 느끼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크루엘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이후 2편에서 어떻게 개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편까지만 접했을 때,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의 크루엘라를 배제하고 생각했을 때, 그를 막연히 나쁘게만 보긴 힘들다.


크루엘라는 타고나길 기질이 남달랐지만 억지로 이를 억눌러야 했고, 어머니와 단둘이 여유라곤 없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크루엘라로서는 유일한 안식처와도 같던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고, 오랜 시간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믿고 지냈으며, 그 이후 만난 두 친구와는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이제 막 행복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 크루엘라는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짧은 서술만으로도 멘탈을 붙잡기 충분히 힘들어 보인다. 누군가 그와 같은 일을 겪는다면 영화에서처럼 악당이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에너지 뱀파이어가 되거나,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는 유리 멘탈이 되기 쉬웠으리라. 이러한 복잡한 서사를 통해 단순히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으로만 남을 뻔했던 크루엘라가 나쁘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훨씬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마침내 빌런으로 각성한 크루엘라


비호감에 가깝던 애니메이션 버전에서 아름답고 화려하게 변신한 비주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6년도 ‘101마리 달마시안’에서의 크루엘라가 그 역할을 맡은 글렌 클로즈의 외모와 관계없이 밉상으로 묘사되었던 반면,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마치 관객들에게 마음껏 좋아해도 괜찮다고, 응원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느낌이다. 주인공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설정에 걸맞게 이 영화는 황홀한 볼거리 또한 쉴 새 없이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엠마 스톤의 연기에 다소 힘이 들어가 있다고 보는데, 여러 면에서 화려하고 강렬한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와는 오히려 완벽한 합을 자랑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스토리도 비주얼도 한껏 세련된 영화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바로 에스텔라에서 크루엘라로 각성하는 과정이다. 본격적인 크루엘라의 서사의 시작점이랄 수 있는 이 각성 과정은 무엇보다 그의 외모 변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와 같은 시각적 장치야 말로 해당 캐릭터가 얼마나 큰 내적 변화를 겪고 있는지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 게다가 크루엘라의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점, 그가 처음에는 본인의 정체를 감추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비주얼을 선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외적 변신은 단순히 180도 다른 외모를 보여주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 캐릭터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드라마틱한 화장과 의상으로 꾸며진 엠마 스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은 물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이면서도 본인의 외모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남성 디자이너들과, 못지않은 각성을 거쳤으면서도 머리를 짧게 깎는 이상으로 외모 변화가 없는 남성 빌런들이 떠오르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 결론적으로 ‘크루엘라’는 드물게도 악당에게 깊고 다층적인 개성을 부여한, 지루할 틈이라곤 없는 잘 만든 오락 영화이다. 언젠가는 이를 발판 삼아 외모에 초점을 덜 맞춘, 그리고 왠지 미워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성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영화 '크루엘라'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8699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3228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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