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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l 09. 2021

[겟 아웃] 나의 일이 되기 전엔 인식하기 힘든 대상화

디즈니 실사영화 캐스팅에 대한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21세기다. 앞으로 그다음 세기, 또 그다음 세기가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진보한 시기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인식 또한 원시적인 시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고, 이제는 최소한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타인을 차별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비록 취업이나 임금 등의 시스템적인 차별은 잔재하지만, 성별이나 인종을 기준으로 교육 기회를 박탈한다거나, 참정권을 허락하지 않는다거나,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일은 거의 없다. (놀랍게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변화한 시대에 맞게 21세기의 차별은 좀 더 은근하게 이루어진다. 서양인의 시각으로 동방의 신비로운 국가라며 추켜세우는 척 동양‘인’을 ‘오리엔탈’이라고 칭한다거나,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친근한 척 포장해 ‘흑형’이라고 부르고, 사회적 맥락 따위 고려하지 않은 채 본능 운운하며 여자들의 예뻐지고자 하는 욕구와 모성애를 당연시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위와 같은 발언들은 상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경멸을 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이 어디가 왜 차별인지 많은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앞선 예시들이 문제인 이유는, 특정 집단을 본인과는 다른 무언가로 ‘대상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처럼 먹고 자고 싸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 보이고 구분되는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화’가 왜 차별인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상당히 미묘한 탓에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아무런 악의 없이 칭찬으로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거 나의 직장 동료가 영화 ‘겟 아웃’을 보고도, 그 영화가 왜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 무언가 다른 존재로 분류되는 불쾌한 감각


영화 ‘겟 아웃’의 흑인 남성 크리스는 백인 여자 친구 로즈의 부모님과의 만남을 앞두고 걱정이 앞선다. 로즈의 부모님이 크리스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크리스를 로즈가 열심히 달래준 덕에, 두 사람은 기대에 차 로즈의 부모님 댁으로 향한다. 그러나 크리스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는지, 이동 중 사슴을 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운전자는 여자 친구인 로즈였건만, 경찰은 우습게도 크리스의 신분증을 요구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한다. 로즈의 부모님 댁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꼭 집어 말하기 애매한 불쾌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백인 여자 친구인 로즈의 부모님 댁에 초대받은 크리스


일단 로즈 부모님의 집 관리인과 가정부는 흑인이다. 백인 가정에 초대받아 같은 흑인들의 시중을 받는 것도 불편한데, 로즈의 가족들은 어쩐지 미묘하게 불편한 대화들을 이어 나간다. 로즈의 아버지는 평소에 쓰지도 않던 ‘This thang’ 같은 소리를 해대고, 오바마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최고라며 찬양하는 등 다분히 흑인인 크리스를 의식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로즈의 동생 제레미는 크리스의 체형과 유전자 구성이면 격투기 종목에서 꽤 잘 나갈 것이라며, 대놓고 지적하기 모호한 말을 한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 집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초대된 손님의 대부분이 백인이다. 파티 손님들은 흑인이 성관계 기술이 더 좋냐는 식의 질문을 고, 골프 선수 중에 타이거 우즈가 최고라며 속 보이는 멘트를 던진다. 그동안은 흰 피부가 유행이었지만 이제는 흑인이 대세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백인이 던진 질문은 아니지만) 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사는 데 장점이 많은지, 단점이 많은지 묻기까지 한다.


백인 손님이 잔뜩 모인 파티에서의 크리스 (가운데) / 백인인 로즈 부모님 댁의 흑인 가정부와 관리인


크리스를 향한 말들은 언뜻 흑인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건넨 말인 것 같지만, 그 속을 파헤쳐 보면 흑인은 본인들과 다르다는 선입견에서 출발한 대상화일 뿐이다. 이제 대놓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상식은 갖추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들과 크리스를 철저하게 구분 짓고 있는 탓에 차별인 줄도 모르고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것이다.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겟 아웃’ 영화 속 크리스가 겪은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가 사람이기 전에 흑인으로 분류됐듯, 남성의 시각으로 같은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만 취급받는 일이 어떠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성차별 또한 미묘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차별의 치읓만 입에 올려도 ‘예민한 여자’ 딱지가 붙는다.



• 디즈니의 속도조차 따라올 수 없다면


나 여자 좋아해요, 나 흑인 좋아해요.


사람들이 차별인 줄 모르고 흔하게 내뱉는 차별의 말 중 하나다. 이런 말들은 주로 본인의 차별적 언사 뒤에 다급하게 덧붙이는 핑계로서 소환된다. 이제는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 시대라고 믿지만, 나는 여자 좋아한다. 여전히 모든 미디어가 백인 중심인 상황에서 백인 캐릭터에 자리에 유색 인종을 캐스팅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나는 흑인 좋아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 자체로 물론 모순적이지만, 특정 성별이나 인종을 김치찌개 좋아해요, 와인 좋아해요, 말하듯이 기호 취급하는 것 역시 대상화이자 차별이다.  (성 정체성과 관련해 특정 성별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예외이다.)


이처럼 21세기의 차별은 차별 당사자가 차별인 줄도 모를 정도로 애매한 것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진보된 과학 기술만큼 차별의 기술 역시 발전한 것은 아닌가 회의감이 들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 ‘인어 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에 흑인인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되었다는 기사에 대한 (일부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대중들의 반응은 씁쓸하기만 하다. 흑인인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두고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들먹이는 이유들은 보통 이렇다. 배우의 외모가 원작 에리얼과 닮지 전혀 않았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백인 왕자가 흑인 공주를 만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 까지.


일차원적으로 생각해도 기존 캐릭터의 인종과 성별을 바꾸어서 캐스팅하면 안 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건 제작자들 마음이다. 그렇다면 바꿔서 유색 인종 자리에 백인을, 여성 캐릭터에 남성을 캐스팅하는 건 괜찮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은 스토리가 백인이나 남성 중심이다. 소수자의 위치에 기득권자로 다시 채워 넣겠다는 건 계속 차별을 이어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에 캐스팅된 할리 베일리(왼쪽)과 '백설공주'에 캐스팅된 레이첼 지글러(오른쪽)


그렇다면 처음부터 유색인종이나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새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 환경 역시, 그리고 여전히 백인과 남성이 다수이다. 그나마 '정치적 올바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미디어 내 소수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는 있다. 그러나 유색 인종 등 소수자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들의 제작 환경이 알고 보니 무척이나 차별적이었다거나, 여성 캐릭터 원톱이지만 남성 캐릭터에 비해 의상의 노출이 심하고 (이성애) 로맨스에 치중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 불만이면 너희가 주인공인 작품을 만들라고 핀잔을 주는 건 속 편한 소리다.


소위 고전이라고 추앙받는 작품들의 경우, 시간이 흘러 리메이크가 되는 경우가 꽤 많다. 내 어린 시절, 해리 포터 시리즈를 무척 재밌게 읽었지만 이입할 인물이 없어 아쉬웠다. 그래서 청소년이 되어 해리 포터를 두 번째로 읽기 시었을 땐, 동양인 여성인 내가 백인 남성인 해리가 된 것처럼 상상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재밌게 봤던 작품들에서 소외됐던 인종이나 성별의 사람들이, 이후 제작자가 되어 그 작품들에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를 입혀 리메이크하지 말란 법도 없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원작에 충실한 캐스팅 운운하며 유색인종 배우 캐스팅을 두고 백인에 빙의한 듯 비난하는 사람들이 해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디즈니 버전 ‘백설공주’ 실사화 영화의 주인공 백설 공주 역에 콜롬비아계 미국인 배우인 레이첼 지글러가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역시나 피부색 운운하는 반응이 있던데, 전혀 놀랍지 않다. 앞으로의 반응들도 놀랍지 않을까 걱정이다.


애초에 디즈니가 실사 영화 제작 시 원작에 충실한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했다면, 또 다른 실사 작품인 ‘알라딘’에서 진보적인 각색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자인 자스민이 알리딘 대신 술탄이 된 데 대해서도 원작 운운하며 PC주의가 과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러니 원작 핑계를 대며 훈수를 놓는 행위는 팬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시대 흐름이 못마땅하다고 떼를 쓰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디즈니 식 진보는 순한 맛이다. 시대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시류를 읽고 너무 늦지 않게 이를 반영하는 것에 가깝다. 이런 디즈니의 속도마저 쫓아오기 힘들다면 그대로 시대에 뒤처지는 길만 남았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하루빨리 인정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이 바로 차별이라는 것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 겟 아웃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6990

할리 베일리 기사 : https://heroichollywood.com/halle-bailey-ariel-the-little-mermaid-set-photos-first-look/

레이첼 지글러 기사 : https://news.cpnews.in/netflix/rachel-ziegler-to-star-as-disneys-snow-white-live-action-movie-ropes-lead-in-west-side-story/1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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