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지만 아마 대충 중고등학교 시절 언젠가였던 것 같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더랬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시기를 미래 시대로 상정하고 그려낸 소설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과연 작가가 그려낸 미래의 세상이, 이미 내가 그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에는 한참 지나 있었으나 얼마나 닮아 있을지 궁금했다. 읽은 지가 제법 되었다 보니 구체적인 내용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휘발된 지 오래다. 하지만‘1984’를 읽고 난 후 한 가지 감각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바로 서늘함이다.
소설의 설정 중에서 나를 가장 서늘하게 했던 부분은 역시 사람들을 365일 감시하기 위해 마련된 시스템일 것이다. 곳곳에 숨겨진 카메라와 마이크, 그리고 마찬가지로 감시를 위해 사용되는 텔레비전까지. 게다가 일부 프로그램은 강제로 시청해야만 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24시간 지켜본다는 설정은 정말이지 숨이 막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49년 처음 발표된 이 소설에 나온 137가지의 설정 중 이미 1978년에 100개가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는 으스스한 소설 속 설정들에, 일일이 의식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 작은 카메라 하나로 담아내는 당신의 모든 것
현 직장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메이는 친구 애니의 도움으로 세계 최고의 IT 기업 ‘서클’의 면접을 보고 합격까지 한다. 신입으로서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메이는 전 직원을 모아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드림 프라이데이’에 참여한다. 메이의 첫 드림 프라이데이에서 서클의 CEO 베일리는 실시간 데이터 분석 처리 기술을 담은 소형 카메라 ‘씨체인지’를 발표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이 카메라는 일반 카메라의 촬영 영상은 물론이고 대기 오염도, 교통량, 기상 패턴은 물론 생체 및 안면 인식, 그리고 저장과 검색 기능까지 갖췄다. 씨체인지를 자랑스레 발표하는 베일리는 말한다. 서클이 사회적 책임을 분담해야 하며, 국제 제판소나 인권이 유린되는 곳, 시위 현장에서도 훌륭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새로운 직장 '서클'에 적응 중인 메이 / '서클'의 CEO 베일리
메이가 미처 서클에 적응을 마치기도 전 정부는 서클의 반독점 위반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고, 그의 동료들은 직원들 간의 유대 형성을 이유로 사내 SNS 및 단체 활동을 적극 독려한다. 동료들의 반강요에 메이는 결국 사내 SNS에 친구 머서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만들어준 사슴뿔 샹들리에를 올린다.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올렸건만 사람들은 머서에게 사슴 죽였다며 비난하기 시작하고, 이 일로 메이와 머서는 크게 다투게 된다. 덕분에 속상해진 메이는 늦은 밤 홀로 카약을 타러 나섰다가 사고를 당하지만 다행히 씨체인지 카메라에 의해 발견, 구조된다. 이 일로 메이는 처음으로 베일리와 따로 면담을 하고, 드림 프라이데이에서 이러한 인터뷰를 하기에 이른다. 모든 경험을 누리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이므로, 앞으로 24시간 씨체인지를 착용해서 자신의 직장 및 사생활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카약 사고 이후 '씨체인지'로 자신의 생활을 모두 공개하기 시작한 메이
• 기술을 등지고 살 수는 없으니까
정말 솔직히 얘기하면 ‘더 서클’이라는 영화 자체는 추천하기가 다소 힘들다. 구글 페이지 상에서 좋아요 비율이 고작 57% 밖에 안 되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주연 배우가 엠마 왓슨에 톰 행크스였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팬으로서 엠마 왓슨은 호감인 배우였고, 톰 행크스의 안목이 틀릴 리 없다고 믿었다. 게다가 마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네뷸라’ 역으로 친숙해진 캐런 길런도 출연한다고 하니 속는 셈 치고 보았는데, 정말 제대로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냉정하게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기술은 별로 놀랍거나 새롭지가 않다. 이미 그 정도 기술은 어디선가 구현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실망스러운 부분은 베일리를 비롯한 서클의 경영진들이 본인들의 기술을 적극 사용하고 더욱 보급해야 한다며 드는 이유들이 하나같이 부실하다. 그런 이유로 ‘화장실 3분’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생활을 공개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영화 상에서는 메이뿐만 아니라 한 하원 의원마저도 서클과 손을 잡고 자신의 모든 메시지와 통화 기록을 공개하는데 합의한다. 이 외에도 서클의 힘으로 투표 의무제까지 시행되는 시점에선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설정이 황당무계하더라도 전개에 설득력만 있으면 가상의 이야기로서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인데, 이 영화는 설정부터 허술한데 개연성마저 힘이 달린다. 그래도 영화에서 건질 거리가 아주 없던 건 아니다. 영화 후반부 서클로 인해 최악의 일을 겪은 메이는 출근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이런 말을 한다.
‘기술을 등지고 살 수는 없잖아요.’
메이의 한 마디를 곱씹어 보았다. 이미 기술이 없던 시절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분명 컴퓨터로만 인터넷을 해도 만족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온갖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영화를 감상한 날 밤,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꿈까지 꾸었다. 뿐만 아니라 현관문을 나선 직후부터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CCTV를 마주한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이것이 빅 브라더가 아니면 무엇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범죄 예방 및 범인 검거를 위해 꼭 필요하단 생각이다. 인터넷 페이지나 유튜브에서 나의 기록들을 추적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보여주는 알고리즘 역시 가끔 께름칙하지만 덕분에 원하는 정보를 쉽게 발견하고, 취향에 맞는 유튜버들을 추천받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들에는 분명 비판할 지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부 등지고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영화'더 서클'에 등장하는, 실시간 데이터 분석 처리 기술을 담은 초소혈 카메라 '씨체인지'
메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닌,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이 말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기술은 어떤 편의를 위해 개발되었다.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면 뭐 얼마나 대단한 부작용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비뚤어진 인간의 욕망이 편리한 기술과 만나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감시나 기록 목적의 초소형 카메라는 성범죄용 불법 촬영에 쓰이곤 한다.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해 온라인상에서 제공한 개인 정보들은 어딘가로 흘러 들어가 수많은 스팸 전화와 보이스피싱 메시지로 돌아온다. 고도로 발달한 인터넷 덕분에 어린아이들도 손쉽게 성인용 콘텐츠를 찾아내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점 덕분에 남에 대한 비방 역시 차고 넘친다는 사실은 이미 고질적인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의 말처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더는 기술을 등지고 살 수는 없게 됐다. 애초에 기술이 주는 달콤함을 몰랐다면 모를까, 줬다 뺐는 것만큼 큰 박탈감도 없으리라. 막연하지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경계하는 일뿐이다. 새로운 기술의 유혹도,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우리 스스로도.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기술에 몸을 맡기고, 기술이 유도하는 대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나머지 37가지 설정마저 현실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