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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Dec 01. 2023

[가재가 노래하는 곳] 자연에 대한 찬양가

모두 그저 자연의 일부였음을






살면서 단 한순간도 신을 비롯한 그 어떤 영적인 존재를 믿어본 적은 없지만 가끔 대책 없이 낭만에 젖을 때면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신이 있다면 바로 자연 그 자체가 아닐까 하고. 집을 나서면 얼굴을 간질이는, 혹은 성난 듯 할퀴는 바람의 느낌, 그 어떤 기술로도 완벽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만의 경이로운 색감, 올려다보지 않고는 시선을 마주할 수 없는 크고 웅장한 나무까지. 비록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 속에서 살고 있지만 자연의 존재감은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다. 아스팔트 길이나 건물 벽 아주 비좁은 틈을 뚫고 자란 자그마한 꽃 등을 발견하면 자연이 뿜어내는 생명의 힘에 감탄하게 된다.


결국 자연이 품은 생명 중 하나라는 점에서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나와 같은 인간인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그 망각이 오래되면서 그 이유가 양심의 가책 때문이든, 아니면 무지 때문이든 인간을 자연의 대척점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지점에까지 도달했다. 이 중 후자의 경우 자연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 우리 스스로를 해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간에겐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기도 한다.



습지 소녀의 단절된, 그러나 온전한 공간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후 아버지 마저 집을 나가고 어린 소녀는 홀로 습지 근처의 집에 남게 됐다. 그런 그는 다른 가족들처럼 떠나기보다 습지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한다. 비록 카야는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지만,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고, 홍합을 따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새와 식물 그리고 곤충들을 그리고, 새의 깃털을 수집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오로지 습지에서만 지내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카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자 불편한 외부인이다.


습지의 집에서 홀로 지내는 카야


그렇게 성인이 된 카야. 언제나처럼 홀로 자연 속에서 외롭지만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오래전 오빠 조디의 친구였던 테이트를 만나게 된다. 카야는 처음에는 마을 사람인 테이트를 경계하지만, 카야는 어느새 자신에게 글을 쓰고 읽는 법을 가르쳐 주며 다정하게 대해주는 테이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서로에게 푹 빠져 버린 두 사람. 하지만 대학에 적응하고 난 후 돌아오겠다던 테이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카야는 또다시 홀로 남겨진다.


체이스 살해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카야


그로부터 몇 년 후, 카야는 마을의 또 다른 남자 체이스와 만나게 되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불안함 속에서 만남을 지속하던 중 카야는 사실 체이스에게 숨겨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카야는 체이스에게 이별을 통보하지만, 체이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카야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카야의 공포심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체이스가 습지 근처의 첨탑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지문도 발자국도 없는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직 자연과 벗 삼아 지내는 카야를 인자로 의심한다.



자연이 인도하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는 분명 일반적이지 않은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영화든 현실이든 폐쇄적이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고향에서 떠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하다. 나로서는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지내 부족하지 않은 기회를 누렸으며, 나 역시 만약 나고 자란 곳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면 주저 없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카야는 가족들이 하나둘 모두 떠나가 홀로 남겨진 와중에도 습지의 집을 지킨다. 심지어는 사랑했던 테이트가 떠나가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별종 취급을 받으며, 체이스가 위협을 가하는 와중에도 카야는 제 자리에 머문다. 젊은 청년이 이처럼 자연 속에 고립된 채 지낸다니,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모습이다.


그러나 카야는 남들의 시선이나 비방에 연연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그 어떤 변명이나 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욕구와 속도 대로 자연을 친구이자 취미 삼고, 자연이 베푸는 것들에 의존하고 감사하며 지낸다. 카야가 남들처럼 했으되 만족을 느낀 유일한 것은 바로 글을 배운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글을 통해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어미가 자식을 떠나는 이유였다. 카야의 사고 속에서 자기 자신이 자연에서 인간으로서 분리된 존재였다면, 그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유를 개인적이면서도 통상적인 이유에서 찾았을 것이다. 바로 아버지의 폭력, 그로 인해 불행해진 가족들. 그러나 카야는 이러한 명백하지만 단순한 이유 대신 자신을 자연에 속한 또 하나의 종으로 인식해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다. 자신을 떠나가거나 이방인 취급했던 사람들 대신 묵묵히 곁을 지켜온 자연에 동화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연에서 본 것들을 그리고 기록하는 카야


이런 면에서 영화 속 카야는 자연의 대변인이거나 자연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을 지닌 자연은 한편으로는 끝끝내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무언가이기도 하다. 카야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이다. 마치 습지의 집에 머무는 한 마리의 새나,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은 카야에게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의 말들을 쏟아낸다. 또한 인간은 되돌려 주는 것이라곤 없이 계속해서 자연을 착취한다. 카야의 마음을 보듬는 법 없이, 그에게서 원하는 것만 취하려던 체이스가 이와 비슷하다.


카야가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체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다. 카야는 그동안 기록하고 그려온 책을 출판사에 보내고, 그곳의 관계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짝짓기 이후 수컷을 먹는 암컷 곤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에 직원들이 경악하며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농담조의 말을 하자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그저 모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고. 영화의 반전과도 연관이 있는 이 대사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 카야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때맞춰 내리는 비에 축복의 의미가 없듯,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기세의 태풍 역시 징벌을 뜻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카야의 모든 행동과 선택 하나하나도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 그는 그저 자연법칙에 따랐을 뿐이다.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한 장면


이미 문명에 속해 기술을 벗 삼아 사는 대부분의 인류가 카야와 같은 생활 방식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카야와 같은 삶을 시혜적으로 보거나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습이 현실적이거나 이상적으로 보기에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습지 밖으로 나서지 않는 카야에게서 본받아야 할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을 자연과 분리되어 그 위에 위치한 지배자로 인식하는 오만함 대신, 인간 또한 그저 자연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5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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