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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n 23. 2023

[앵커] 축복과 짐 그 사이

서로에게 결혼하지 말라는 엄마와 딸






실제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정도와 별개로, 이제 페미니즘 서적들은 쉽게 접할 수 있게 됐고, 베스트셀러 목록 중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작품은 거의 없지만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워낙 많아져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때 ‘82년생 김지영’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상대방(정확히는 여성)의 사상 검증 요소로 소환되곤 했다. 나만 해도 소설이 영화화 됐을 시점, 소개팅으로 만날 ‘뻔’ 했던 남성이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언뜻 보이는 ‘82년생 김지영’ 책을 보고는 혹시 페미니스트냐고 질문한 일이 있었다. 사실 그 책 하나만 올린 것은 아니었고, 민음사에서 정기적으로 출판하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책들을 모아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대뜸 나의 가치관이 본인의 입맛에 맞는지부터 확인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여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묻지 않아도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남성들에게 나쁜 무언가로 인식하는 티도 역력했다. 아쉽게도 일침을 놓았다던가 사이다 같은 결말을 맞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바로 그날 상대의 연락처를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 애쓰는 나에게조차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안겨준 작품이지만 사실 ‘82년생 김지영’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나도 똑같이 귀한 사람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여자 또한 누구의 딸, 아내, 엄마로서만이 아닌 나라는 존엄한 한 사람으로서, 이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렸을 때부터 크고 작은 성차별에 노출되어 있던 그의 생활에 더는 전진 없이 정체된 듯 변한 분기점이 있다.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가부장제 특성상 육아는 우선적으로 엄마의 몫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또한 한국 정서 상 아빠들은 육아 휴직을 쓰고 싶어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육아 휴직을 신청해 놓고 육아가 아닌 본인을 위한 시간으로 쓰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조건들 속에서 한국의 평범한 여성일 뿐인 김지영은 자연스레 육아와 가사노동을 홀로 떠맡으며 경력 단절을 겪게 된다.


나만의 아이가 생긴다는 건 분명 엄청난 사건일 것이다. 나에게는 아이가 없어 정확히 어떤 감정일지 감히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살면서 보고 들은 데 따르면 단순히 벅차고 행복하다는 말로도 다 설명이 되지 않는 경이로운 경험인 듯하다. 이러한 설명 뒤에 따르는 또 다른 말은 기쁘고 행복한 딱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한때 돌아다니던 밈이 있다. 동물의 체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작은 인간뿐이다. 돌려 말하면 어린아이들의 체력은 실로 엄청나다는 의미이리라. 갓난아기를 키우는 동안에는 수면의 질은 물론, 양 또한 포기해야 한다. 체력이 바닥임은 물론, 개인주의 성향도 강한 나로서는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의 어머니들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감수해야 한다. 평범한 다른 어머니인 82년생 김지영 역시 겪은, 경력 단절의 가능성이다. 일단 한 번 꺾인 커리어는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불안감 역시도.



너만 없었으


스타 앵커 세라는 방송국 개편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방송을 코앞에 두고 그에게 직접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누군가 자신의 딸을 죽이고 이제 자신까지 죽이려 한다는 젊은 여성. 얼마간 대화를 이어가던 세라는 그저 장난 전화로만 생각하고 결국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엄마 소정은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며 세라에게 직접 취재를 해보라고 설득한다. 결국 여자의 집에 도착한 세라는 놀랍게도 욕조에 죽어 있는 어린아이와 장롱 속에 목을 맨 채 죽은, 아이의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자신에게 걸려온 의문의 제보 전화를 받고 현장을 찾아간 세라


두 모녀의 부검 결과를 기다리던 세라.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앞에 죽은 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소정은 별거 중인 세라의 남편 기태가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혼하라며 종용하고, 반대로 기태는 이만 둘의 아기도 가지고 관계를 회복해 보자며 세라를 설득한다. 곧이어 죽은 모녀의 사인은 타살이 아닌, 유아 살해 후 자살로 밝혀지고, 이 모든 상황으로 인해 세라는 심리적으로 점점 불안정해진다.


엄마 소정과 갈등 중인 세라 / 정신과 의사 인호를 찾아간 세라

두 모녀 사건을 계속 파보던 세라는 결국 여자가 죽기 전까지 만나던 정신과 의사 인호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어쩐지 의심스러운 인호의 수법을 밝히기 위해 세라는 내친김에 그에게서 직접 최면 치료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세라의 신경증은 더욱 심각해지고, 그는 생방송 도중 누군가에게 빙의한 듯 이렇게 중얼거린다.


“너만 없었으면…….”



끊어 버리


딸 세라를 임신하면서 커리어를 잃은 소정, 그리고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공부를 그만두어야 했던 자살한 대학생 엄마. 영화 ‘앵커’는 서늘한 공포 영화의 얼굴을 하고서 경력 단절이 된 어머니와 이에 양가감정을 느끼는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일까. 한 영화 사이트에 남겨진 ‘앵커’ 후기 중, 이런 질타 섞인 코멘트가 있었다. 여성 감독이 이런 영화나 만드니까 출생률(원글에선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이 코멘트를 진작 봤더라면 내가 이 영화를 좀 더 빨리 감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코멘트를 남긴 (아마도) 남성이 분명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선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리라는 것도. 반쯤 농담이지만 이 코멘트의 주인공이 내 사상을 검증하려 했던 그 소개팅남이라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육아에 전념하고자 일을 관두고 가정에 남기로 결정한 어머니. 백 퍼센트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어머니를 보며 아들들은 애틋함과 감사함, 그리고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비슷한 감정들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머니를 지켜본 딸들은 여기에 더해 죄책감이나 안타까움과 함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조금은 배은망덕한 다짐까지 품게 된다. 몇 년 전쯤 인터넷에 이런 질문이 유행했었다. 만약 결혼하기 전,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줄 거냐고. 이에 대해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대부분 몇 년도 복권 당첨 번호나 언제 어느 지역 집값이 오르는지 등의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유쾌한 분위기의 댓글들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아빠와 결혼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반응들이 주를 이루었다.


영화 '앵커' 속 장면들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부모에 대해 마치 원죄처럼 자식이 죄책감을 갖는 일은, 당연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 이후 같은 여성인 어머니의 삶이,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어머니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켜본 딸들로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왠지 모성애라는 당연시되는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애써 아이가 주행복집중해 보지만, 어머니들 또한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곱씹으며 얼마간은 아이가 족쇄처럼 느껴진대도 놀랍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과 짐 그 사이에서 딸에게 결혼하지 말고 하고픈 걸 다 하고 살라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결혼을 포기, 혹은 거부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처럼 원죄와 원망이 뒤섞인, 모녀간의 굴레를 끊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건 제도가 뒷받침되는 일이다. 여성들이 그 어떤 구애(拘礙) 없이 자유롭게 일하고, 기꺼이 아이도 낳을 수 있도록. 그러나 대부분의 신혼부부 지원 및 출산 장려 정책들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필요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그나마 있는 제도들도 사회적 인식이 받쳐주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능만 하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도, 자식을 낳지도 않고 자유롭게 사는 일. 이러한 선택들이 계속 쌓인다면 언젠가 후세대 여성들만큼은 그 어떤 내적 갈등 없이, 자신만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모두 포기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는 조금의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거나, 혹은 언제든 자유롭게 다른 선택지를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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