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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Aug 06. 2021

[라스트 홀리데이] If I were her

지금 행복해져도 괜찮아



나는 속으로만 자기애가 넘칠 뿐, 입 밖으로 자화자찬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교적 부끄러움 없이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셀프 칭찬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성실함. 대학 시절부터 과제는 제때 내고, 약속 시간은 엄수했다. 그러다 회사를 관두고 재택이 가능한 직업을 갖게 되면서 여유 시간이 늘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용하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 평일 주말, 심지어는 공휴일 구분 없이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꽤 부지런한 생활을 이어 왔다.


이처럼 하루 종일 먹고 놀기만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휴일마저 체계적으로 보내려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조금 민망하지만 언젠가는 내 소설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을 떠는 것이다. 이런 나 자신이 가끔 기특할 때도 있지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이렇게 성실해진 나의 마음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타고나길 미래지향 주의자였던 데다, 앞으로 원하는 위치에 오른 나 자신을 꿈 꾸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소소한 행복 같은 건 잘 느끼지 못하게 됐다.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문득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러다 평생 부지런만 떨다 죽으면 어떡하지?



• 내가 만약 곧 죽는다면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의 주인공 조지아 버드는 주방 용품 가게의 점원이다. 직장에서 최고의 직원으로 뽑힐 정도로 언제나 성실히 근무하고, 물건을 구매할 땐 할인 쿠폰을 챙기며 알뜰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지아는 남몰래 흠모하던 아래층 매장 직원인 숀과 대화를 나누던 중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만다. 그렇게 도착한 사내 클리닉 센터에서 조지아는 자신이 램핑턴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살 날이 앞으로 고작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매장에서 근무 중인 조지아


‘좋은 일이 생기길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조지아의 첫마디다. 슬픔에 빠져 술을 마시던 그는 그동안 꿈꿔 왔던 모든 것을 스크랩 해 둔 ‘가능성(possibilities)’ 책을 들춰 보기 시작한다. 가볼걸, 먹을걸, 해볼걸. 우울한 한탄만 하던 조지아는 바로 다음 날, 시간당 75센트를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그대로 직당을 그만둔다. 그렇게 그의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 시작된다.


직장을 뛰쳐나온 조지아는 ‘가능성’ 책에 스크랩해두기만 한, 꿈에 그리던 프라하의 ‘그랜드 푸프 호텔’로 떠난다. 어차피 살 날이 한 달도 채 안 남았겠다, 그는 소위 말하는 ‘플렉스’도 망설이지 않는다. 승무원과의 살랑이 끝에 비행기 좌석을 일등석으로 옮기고,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헬리콥터를 부르며, 방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리기 싫어 하루 3천 유로 짜리 귀빈실로 업그레이드한다.


'가능성' 책에 스크랩 해두었던 모든 것을 다 해보는 조지아


이렇게 돈을 아낌없이 쓰던 조지아는 사소한 오해 덕분에 호텔 직원과 같은 투숙객들 사이에서 루이지애나의 부호로 알려지게 된다. 그 이후 우연에 우연이 겹쳐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시절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해프닝들을 겪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친다.


영화는 마침내 예측 가능한 해피 엔딩으로 달려간다. 알고 보니 조지아의 병은 오진이었고, 그 이후로 그는 ‘가능성’의 책과 함께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는 대신, ‘현실(realities)’ 책과 함께 날마다 최선을 다해서 하고픈 일들을 다. 전반적으로 뻔한 전개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내가 만약 조지아였다면?



• 오늘의 행복을 미루지 말자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대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어른이  이후, 특히나 나만의 ‘가능성’ 책이 생긴 지금, 세상이 멸망해 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더는 바라지 않게 됐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만의 목표가 생긴 이후부터 나는 조지아 못지않은 성실하고 꾸준한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솔직히 얘기하면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것조차 가끔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에 내 머릿속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면 몇 백, 몇 천 자는 쓰고도 남을 텐데 싶어서. 그래서 누군가 얼굴 좀 보자고 해도 슬금슬금 만남을 뒤로 미루며 혼자만의 루틴을 이어 갔다.


덕분에 당연히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어쩐지 내 생활이 점점 더 퍽퍽해지고 건조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불안한 생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스트 홀리데이’의 조지아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어쩌나 하고. 그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을 텐데.


조지아와 그의 '가능성' 책 속 남자 숀


물론 내가 조지아였다면 직장 내 클리닉 센터의 진단만으로 시한부임을 인정하는 대신 큰 병원에 먼저 가 보았을 테지만,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 일탈을 시도하는 건 동일할 듯하다. 일단 비행기 표를 끊어 미국의 디즈니랜드부터 들른 다음, 근사한 휴양지로 가서 해양 생물들과 수영을 즐기고 싶다. 그다음 오로라도 보고, 우유니 사막에  가 보리라. 마음 같아선 우주여행도 하고 싶지만 이건 오래 산다고 해도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니 패스.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버킷리스트들은 이 정도다. 지금 당장은 여건이 안 되지만, 최소한 10년 안에는 꼭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들이다. 하지만 ‘라스트 홀리데이’를 보고 나니 오늘의 행복을 미루고 내일만 기대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다. 인생의 마지막 화려한 챕터만을 위해 지난한 과정을 억지로 견디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라스트 홀리데이’의 조지아처럼 원 없이 모든 걸 당장 실천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을 터. 일단 내가 3주 안에 죽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 미래를 위한 대비는 어느 정도 해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오늘 행복해질 방법은 여전히 존재한다.


업무 때문에 켜 놓았던 노트북을 끄고 즉흥적으로 영화관에 가거나, 독서 모임 때문에 보고 있던 인문학 서적을 덮고 순전히 재미만을 위한 소설책을 읽을 수 있다. 다음에 보자며 인사치레만 건넸던 친구에게 전화해 만나자고 할 수도 있고, 오직 허기를 채울 목적으로 대충 차린 인스턴트 대신 나 스스로를 위한 요리를 할 수 있다. 꼭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소소한 일들로 하루하루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습관은 쉽게 바꾸지 못하는 법. 아마 나는 앞으로도 제법 성실한 생활을 이어 나갈 확률이 높다. 영화 바깥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만큼, 매일 같이 엄청난 일들을 벌일 수도 없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이제 더는 소홀히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내일로 미루지 않으면서.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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