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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y 12. 2023

[조지타운] 그가 세운 모래성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최근 뒷북으로 드라마 ‘안나’를 재밌게 감상했다. 주인공 이유미, 혹은 이안나가 변명할 여지없이 거짓말쟁이라는 점에서 호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캐릭터이기는 했으나 적어도 가상의 인물로서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이유미의 이상은 원대하나 이를 마음껏 펼치기에는 집안 사정이 따라주지 않았고, 그나마 똑똑한 머리를 갖추었으나 자신은 좀 더 큰 것을 누려야 한다는 허영심에 그나마도 발휘하지 못하고 자꾸만 헛발질을 한다. 그러던 끝에 그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다 가짜 대학생 신분에 맞춰 생활하기 위해, 돈 많은 집안의 딸 시늉을 하기 위해 거짓말의 가짓수와 그 폭을 넓혀 가다 이내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하기에 이른다. 이유미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이고 부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이의 삶을.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진 거짓된 삶의 끝이 아름다울 리 없다. 드라마 ‘안나’ 덕분에 원작이랄 수 있는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까지 읽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서스펜스는 부족했으나 자꾸만 호기심을 자아내 책을 놓을 수 없었다는 점은 드라마와 비슷했다.


드라마 ‘안나’의 이유미처럼 유명한 거짓말쟁이로는 영화 ‘리플리’의 톰 리플리가 있을 것이다. 신분을 먼저 훔치느냐, 거짓말부터 하느냐의 선후 관계의 차이는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이 거짓말의 시발점이었다는 점, 비록 본인 스스로의 재능은 부족했을지언정 남의 환심을 사는 데는 탁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농담으로도 거짓말을 잘 못하는 나와 달리 두 주인공은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조마조마해지는 것이 무색하게도 매끄러운 언변과 순발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물론 거짓으로 쌓아 올린 탑은 부실하게 마련이고, 두 사람 모두 그 실속 없이 높이 쌓아 올리기만 했던 탑이 마침내 무너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다만 원작 소설 속 리플리는 디키와의 사건 이후로도 계속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둘보다도 출세지향적이며 웬만한 위기 앞에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또 한 명 있다. 바로 영화 ‘조지 타운’의 울리히 모트이다.



인턴, 집사, 외교관, 그리


출세에 대한 열망에 비해 능력은 따라주지 않는 남자 모트. 인턴 신분으로 일하던 그는 해고당한 당일 하원의원의 비서실장의 신분증을 훔쳐 백악관 출입 기자 만찬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노년의 유명 저널리스트 엘사를 만나고, 그의 화려한 인맥이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에 모트는 지속적으로 호감을 표하다 마침내 엘사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역시나 대단한 인맥을 자랑하는 엘사는 집사처럼 자신의 비위나 맞추기 바쁜 남편에게 유엔에서 일하는 자신의 오랜 지인을 소개해 준다. 엘사 덕에 출세의 물꼬를 튼 모트는 한 사람의 이름을 팔아 다른 이를 포섭하고, 덕분에 별다른 실체나 목적도 없던 자신의 NGO 단체도 성장시킨다.


모트와 엘사, 그리고 엘사의 딸 어맨다


이렇게 엘사는 자신보다 젊고 매력적인 남편에게 푹 빠져 지내고, 모트는 아내의 방대한 인맥 덕을 톡톡히 보던 어느 날. 모트의 유엔 회의에서의 연설 때문에 두 사람은 호텔에 묵게 되고, 그가 일하러 떠난 사이 엘사는 그런 남편을 위해 고가의 시계를 선물로 준비해 숙소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엘사를 기다린 것은 바쁜 남편이 떠난 빈 방이 아닌, 가 젊은 남성과 발가벗은 채 밀회를 즐기고 모습이다. 이에 모욕을 느낀 엘사는 모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쏟아내고, 결국 둘의 싸움은 격해져 경찰을 부르기에 이른다. 그날 이후 모트는 종적을 감추고, 엘사는 그런 남편을 목 놓아 다린다.


제복을 입은 모트


호텔에서의 일로 다툼을 벌이고 2년 후, 엘사에게 전화한 모트는 마치 외교관이라도 된 듯 자신이 현재 바그다드에 머물며 그곳에서의 내전을 막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런 모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엘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느냐고 묻는 남편을 기꺼이 다시 받아들인다. 이렇게 과거의 싸움은 과거에 묻어 두고 평화가 찾아오는 줄 알았건만. 부부가 파티를 열고 손님들이 모두 떠나간 이후, 두 사람이 사소한 언쟁을 벌인 끝에 모트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간 사이 엘사가 머리를 크게 부딪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과거 엘사의 신고 기록, 그리고 그가 남긴 엄청난 재산으로 인해 모트는 순식간에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



거짓말의


영화 ‘조지타운’의 모트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나 역시 출세 욕심이 없지는 않다. 대신 모트와 중요한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 그의 경우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알려져 영향력을 행사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과 나의 성취만 알고, 눈앞에서 나를 직접 목격해도 누군지 못 알아보길 원한다. 모트와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또 한 가지 차이는 바로 기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대부분의 허풍선이 및 사기꾼들과 마찬가지로 모트 역시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상대에 따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도 금세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부풀리고, 본인에게 없는 것을 약속하는 데 있어 주저함도 없다. 하지만 평균적인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머뭇댈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일단 한 번 입에 올린 이상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조지타운'의 한 장면


그러나 모트와 같은 인물들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바로 지금 당장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에서. 모트는 자신이 좀 더 나은 것을 누릴 자격과 그럴 능력이 있지만,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이상적인 스스로의 모습과 현실의 자기 자신 간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자존심이 쉽게 다친다. 그렇기에 모트는 성공한 저널리스트인 엘사라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기꺼이 이를 활용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보다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 급급해, 엘사의 인맥을 활용해 제대로 일을 하기보다 여기저기서 환심을 사고 본인의 존재를 알리는 걸 우선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저 이름만 알 뿐 실질적인 친분은 없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팔아가며 신뢰를 얻고, 이를 통해 실체도 없는 NGO 사업에 이름을 올리게 만드는 일종의 폰지 사기까지 벌인다.


이와 같이 자신의 힘으로 정직하게 성공을 이루어내는 대신 거짓을 통해 자격이 없는 위치에 오른 모트와 같은 이들에겐 진실이야 말로 아킬레스 건이다. 모트가 집을 떠나 있는 2년 동안 정말 그가 이라크의 내전을 막느라 바쁜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던 엘사는 어느 날 날아온 세금 신고서 덕분에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엘사는 신랄하게 모트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가장 아픈 곳을 찔린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폭발한다. 흥미롭게도 영화 ‘조지 타운’은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이야기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모트와 같은 부류의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여럿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 그 끝이 좋았던 (즉 잡히지 않고 무사한) 사람은 내가 기억하는 한 별로 없다. 이처럼 능력과 노력이라는 뼈대 없이 모래만 퍼다 올린 부실한 탑이 결국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주제를 알고 본인의 위치에 만족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욕심은 부릴 수 있다. 그래도 두 발 뻗고 편히 잠들자면 역시 정직이 최고의 미덕임에는 분명하다.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466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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