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추억이 조심스러워서
많은 이들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타고난 성향 자체가 미래지향적이어서일까, 나의 경우 과거가 그립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한때 함께 즐거웠으나 이제 더는 내 곁에 없는 이들 중 보고 싶은 이도 거의 없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이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나마 문득문득 보고 싶어지는 이들은 하나 같이 내가 잘해주었다기보다 나에게 잘해주었던 이거나, 나로서는 그동안 생각지도 못한 관점을 심어준 이들이다.
첫 번째로 생각나는 이는 중학교 시절 2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친구이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연락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다. 그 친구가 내게 해주었던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나의 생일 즈음 만난 어느 날, 기대보다 훨씬 좋은 선물에 감동하자 그 친구가 얘기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주어야 한다고.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갓 스무 살 된 어린 나이였기에 꽤 감명받았다. 마찬가지로 스무 살, 그 친구와 또 만나게 된 어느 날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여성스러운, 남자다운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그 친구는 그 표현들이 썩 권장할만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지만 당시에는 그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감탄했다.
또 한 명 생각나는 친구는 고등학생 시절 단짝이다. 유난히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고, 내가 뭘 하자고 하든 좋다고 하는 그런 친구였다. 학창 시절 사귀었던 친구 중 집에도 가장 많이 놀러 갔던 그런 친구였다. 마찬가지로 갓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만나다가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첫 번째로 언급한 중학교 시절에 만났던 그 친구의 경우 관계가 흐지부지 된 데 명확한 이유가 없으나, 이 친구의 경우 인정하기 불편하지만 원인이 오로지 나에게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좋은 친구였던 만큼, 내가 그 친구에게 좋은 친구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 두 친구들에 대해서는 종종 궁금해진다.
뉴욕 맨해튼에서 홀로 외롭게 사는 ‘도그’. 사이좋은 이웃 커플의 모습을 보며 쓸쓸해하던 그는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광고에 홀려 로봇 하나를 주문하게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그가 손수 조립을 마친 후 작동을 시작한 ‘로봇’. 서로를 향한 다정한 미소를 시작으로, 도그와 로봇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함께 공원 산책도 하고, 롤러스케이트도 타고, 핫도그도 먹고, 많은 이들 앞에서 춤도 춘다. 이제 외로움이라곤 없이 언제나 행복한 나날들만 계속될 것 같았던 어느 날, 둘은 해변으로 향한다.
따스한 햇살에 넘실대는 푸른 바다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시간을 보내던 둘은 모래사장 위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만다. 이제는 집에 가야 하는 어둑어둑한 시각. 하필 로봇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도그는 어떻게든 단짝인 로봇을 옮겨 보려 하지만 너무나 무거운 그의 몸은 꼼짝하지 않는다. 근처의 공중전화 줄은 끊겨 있고, 도움을 청할 이는 아무도 없는 상황. 도그는 어쩔 수 없이 로봇에게 내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실제 영화에서는 대사가 전혀 없다)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날 곧장 해변으로 돌아온 도그는 절망스럽게도 ‘폐장’과 ‘6월 1일 재개장’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한다. 하지만 내년 여름까지 로봇을 방치할 수 없던 도그는 몇 번이고 해변에 몰래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다 경찰에게 체포되기까지 한다. 도그는 어쩔 수 없이 내년 6월 1일을 기약한다. 그러는 동안 모래사장 위에 곧게 누워만 있는 로봇은 계속해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언젠가 다시 도그에게 돌아가는 그런 꿈을.
딱하게도 제법 긴 시간 동안 로봇은 해변에 누워만 있다. 그나마 다행히라면 로봇이 결국 그 자리에서 탈출한다는 사실이다. 해변에서의 이별, 그리고 로봇을 되찾으려는 시도의 번번한 실패가 둘의 관계의 결말을 암시한다. 마침내 6월 1일이 되어 도그는 해변에 찾아갔으나 로봇은 더는 그 자리에 없었고, 둘은 우여곡절 끝에 각각 다른 반려 로봇과 반려 동물(어쩐지 어감이 어색하지만 영화 상에서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을 만나게 된다. 우연찮게도 로봇의 새로운 반려 동물의 거주지는 도그가 살던 곳과 멀지 않다. 덕분에 로봇은 어느 날 도그를 발견하지만, 심지어는 그 뒤를 쫓아가지만 끝끝내 도그를 붙잡지 못한다.
그때의 로봇이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는 하지만 로봇은 결국 어떤 ‘존재’라기보다 ‘물건’에 가까우며, 생명체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나의 인식에 기반한 의문은 잠시 묻어 두고 고민했다. 앞서 언급한 나의 기억 속 두 친구를 떠올린 것은 물론이다. 내가 로봇이었다면 선뜻 도그에게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반려 로봇과 함께 하고 있는 그에게? 일차적으로는 안타까움이 섞인 ‘말이라도 붙여 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시 나의 앞에 그 상대를 불러 세운들, 그때 그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보장이 있을까. 괜한 욕심으로 인해 그때의 추억마저 퇴색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결국 도그를 그대로 보내 버린 로봇의 심정이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나만 해도 어제의 기분과 오늘의 기분이 다르다. 몇 년 전과 지금의 내가 같을 리 없다. A라는 이와 함께 하던 시절 원하던 것과, 그를 떠나보내고 또 다른 이와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바라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미 과거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더는 써 내려가지 못한 인연을 억지로 새로운 페이지에 끌어다 온들 그때처럼 아름다울 리 없다. 가끔씩 곱씹던 아름다운 추억이나마 잃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상대가 학창 시절의 단짝 친구이든, 죽고 못 살던 연인이든, 우애를 다졌던 직장 동료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절 인연’이라는 표현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적지만 일단 한 번 마음을 열고 나면 정이 넘치기 시작하는 나는 다짐하게 된다. 지금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은 과거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보내 버리지 않겠다고, 내 욕심이라 할지라도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들의 흔적이 남을 수 있도록 예전의 나보다 좀 더 성숙하게 노력해 보겠다고 말이다.
사진 출처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