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지만, 한 사람에 대한 일차원적이고 표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이만한 지표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유형의 끝자리를 공유하자면 J이다. 학창 시절만 하더라도 어차피 계획을 세워봤자 지키지도 않을 텐데 뭐 하러 세우냐는 발언으로 당시 함께 살던 고모의 혈압을 오르게 했던 내가 성인이 되고 좀 더 단단히 자아를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J에 가까워졌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J는 미리 판단함으로써 앞으로를 대비하려는 편이라 좀 더 계획을 세워두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단순히 계획성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번 주제가 MBTI는 아닌 만큼 이쯤 해두자.
나와 같은 성향의 또 다른 특징을 말하자면 통제 욕구로 인해 계획이 틀어질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 미리 준비하려고 하지만, 미리 생각해 둔 경우의 수마저 부족했음이 드러날 때가 있다. 가장 허무할 때는 앞서 준비해 둔 무언가가 막상 내가 예상한 사건의 시점이 닥쳤을 때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이다. 내 예측도 빗나간 데다 한 치 앞도 못 보고 사서 시간을 낭비한 꼴이라니.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내린 결론이 있다. 어쩔 수 없지, 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이다. 뭘 어쩌겠는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정확히는 나의 연약한 자아와 의지 정도라고 하겠다. 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길 가던 고양이, 대자연 중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내 몸상태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백날 전날 앞날을 추측해 준비한다고 한들 예상 밖의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막지 말란 법이 없다. 마음을 완벽에 가깝게 다잡는다고 한들 갑자기 장염에 걸린다면 그날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독기를 가득 품어 나의 신체적 고통을 무시한다고 쳐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다면 나는 결국 만사 제쳐두고 뛰어갈 것이다.
• 위기의 연극 캠프, 솟아날 구멍은 있는가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 캠프 애디론드의 단장 조앤. 캠프 운영 동료이자 친구인 리타와 그 해 여름 캠프의 마지막 날 공연을 관람하고, 예산 부족 문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조앤은 갑작스레 찾아온 심장마비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다. 얼떨결에 어머니의 뒤를 잇게 된 아들 트로이는 캠프 운영은 물론 연극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엄청난 위기 상황에도 불구, 캠프는 또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법. 애디론드 캠프의 선생이자 어릴 적 연극을 통해 친해진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단짝으로 남아 있는 리베카와 에이머스는 새로운 공연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리베카 다이앤과 에이머스
그런 두 친구는 조앤의 회복을 바라며 그에게 헌정하는 공연을 기획한다. 새로운 선생님도 고용하고, 오디션도 진행하고, 공연에 들어갈 곡도 준비하며 열의를 보이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캠프는 5미터마다 있는 과속 방지턱에 걸리듯 계속해서 크고 작은 위기를 맞이한다. 투자를 끌어오겠다고 나서던 트로이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캠프를 포기하는 서류에 사인을 해버리지 않나,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은 학생은 더 좋은 기회를 만나 공연 목전에 캠프를 떠나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순간 공연 준비에 소홀해진 리베카가 알고 보니 에이머스 몰래 크루즈 공연에 오를 수 있는 오디션을 본 사실이 밝혀지면서 둘의 우정에도 금이 간다.
배역 오디션
•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대부분의 작품들이 포스터만으로도 해피 엔딩일지, 새드 엔딩일지 예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어터 캠프’는 대놓고 해피 엔딩이라고 말하는 영화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시어터 캠프’는 만약 실제 상황에다, 내가 바로 당사자라면 입이 바싹 마르고 속이 탈 위기 상황들 마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생각 정도는 들었다. 만약 나라면 저렇게 숨 돌릴만하면 닥쳐오는 위기 상황 앞에 평온할 수 있을까, 하고.
앞서 내가 얼마나 사전 준비를 좋아하는지 언급했다. 이런 내가 ‘시어터 캠프’ 속 캐릭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리베카와 에이머스의 동료였다면? 나는 아마 A를 한 다음 B를 하고, 혹시 모르니 C와 D라는 대안을 준비해 놓은 다음, 계획보다 긴 루트를 타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E라는 마무리에 도달해야 한다고 마음먹을 것이다. 다시 깨어난 조앤을 뿌듯하게 하고, 나 스스로의 성취감을 위해. 그런데 조앤의 아들 겸 새로운 캠프 운영자 트로이는 경쟁 업체에 캠프를 팔아 버리고, 공연을 홍보하겠답시고 믿음도 안 가는 이상한 인플루언서들을 데리고 오며, 공연 기획의 주춧돌이랄 수 있는 리베카와 에이머스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캠프를 더욱 위기로 몰고 간다. 그렇다고 다른 선생들이 퍽 믿음이 가는 것도 아니다.
조앤의 아들 트로이와 새로 고용된 캠프 선생님 자넷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이런 종류의 상황이 어디 비단 영화 속에서만 한정된 것일까? 지금까지 나의 직장 생활을 되돌아보더라도, 대학 생활과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더라도 이와 비슷한 상황은 항상 있었다. 심지어는 원인도 모를, 혹은 알기 무서운 우울감 때문에 전부 다 놓아 버리고 싶은 적도 존재한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위기들은 앞으로도 잊을만하면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앞서 계획을 세우고 대비를 한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신이 아니고서야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수포로 돌아간 계획만 붙들고 있을 수도, 이미 닥쳐 버린 상황을 외면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내렸던 결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주해야 할 답이 한 가지 더 있다.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는 것. 이미 엎질러진 물 앞에 뭐라도 해보는 것. 아마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새롭게 떠올린 대안이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되돌아볼 적에 그때 이렇게 해볼걸,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무엇이든 그냥 그대로 포기해 버리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삶이 항상 평온할 수는 없듯, 항상 나쁘기만 한 것 또한 아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결국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해피 엔딩을 맞이한 ‘시어터 캠프’ 속 주인공들처럼 결국 웃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