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제사.

by 헛된상상

음력으로 9월 초가 할머니의 제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 정도 되었지만.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49제 같은 건 지내본 적도 없다.

물론 지금까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낸 적도 없다. 우리 집처럼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정성 들여만든 음식으로 지내겠다고 그리 호언장담하던 작은 큰집은 결국 제사 두어 번 지내더니 못하겠단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지 않다는 말과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둬버렸다.

그 말에 우리 집은 황당했다. 하지만 결코 제사는 도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에게 보인 뻔뻔한 행동과 호언장담하던 말 때문에 우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제사를 지냈다가는 그 뻔뻔한 행동으로 본 건데 우리한테 떠넘길게 분명했다.


할머니 장례식에서도 그리 뻔뻔한 행동과 허세에 찌든 말로 모든 사람들을 농락하면서 뒷수습은 우리에게 떠넘기려고 준비하는 게 보였는데, 우리가 미쳤다고 그 술수에 넘어가겠냐고. 참 뭐라 할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유독 형제 복이 없었고, 할머니는 자식복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할머니를 자식 앞길을 망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엄마도 할머니도 다 똑같아 보였다. 아마 그래서 그런지 허구한 날 서로 싸워댔다.

그래서 우리 집은 바람 잘날 없었고, 언제나 동네에서 유명한 시끄러운 집이었다.


친할머니는 동네에서도 유명했던 고집불통 여사였다. 고집도 세고, 지기도 싫어해서 항상 경로당에서 화투판을 엎던 여사님. 그래서인지 동네 경로당에서는 할머니가 떴다 하면 다들 도망가기 바빴다.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를 벌벌 떨게 하던 할머니는 세월도 비켜갈 수 없었는지 아프기 시작했다. 치매라는 늪에 빠진 것이다.


할머니의 대한 기억은 잘 없다. 나의 기억 속에 할머니는 싫은 사람으로 각인이 되어있었다. 그저 딱히 싫은 기억도 없는데 어느 순간 싫은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어서 나 조차도 의문이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있던 기억 때문이지 않나 싶다.

할머니는 유독 일찍 돌아가신 큰 아버지와 자칭'큰집'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작은 아버지를 좋아했다. 즉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그 시절 사람이라 딸만 넷이던 우리 집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렇게 항상 고집불통이고 아무한테도 지지 않을 거 같던 할머니는 치매에 늪에 빠지셨고, 죽고 못살았던 큰집이라 불리고 싶어 하던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왜 끝까지 모시지 않고 작은 큰집에 보내냐고 하겠지만, 그분들이 원했던 결과였다.


아버지에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큰집은 우리 집을 깔아보고 뭉갰다. 매일 동네에서 우리 집을 욕하고, 할머니를 잘못 모신다, 조상님 제사상 음식을 사서 지낸다는 게 말이 되냐는등 우리 집 욕하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우리 귓가에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렇기에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말을 듣고 바로 모셔갔다. 물론 할머니 앞에 있던 통장하고 도장까지 싹 다 말이다. 그래놓고 우리에게는 예의 없는 놈, 효도 모르는 집안이라고 언제나 욕을 어찌나 하던지 참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할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코로나가 터지기 전이었고, 그날은 할머니 생신이었다. 나와 동생은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는 직감적으로 아셨나 보다.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나와 동생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나도 집에 가자고 나도 집에 가고 싶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데리고 올 수도 요양원에서 잠깐의 외출도 눈치를 봐야 했다. 모든 것은 작은 큰집이 주관했으니까. 처음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모신 것도 작은 큰집이고 우리에게 뭐라고 하면서 모셔간 것도 작은 큰집이었다. 그래놓고 할머니를 우리 집에 도로 데려다 놓으려는 것을 아버지가 딱 끊으셨다. 그동안 우리도 할 도리를 했으니 이제 작은 큰집이 해야 한다고.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도 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우린 꾹 참아야만 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작은 큰집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

조의금 분배할 때, 큰 소란이 일어나기 싫어서 참았는데 너무 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자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빼놓고, 조의금을 분배하였다고 하니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아버지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울분이 눈에 그려졌다.


아버지는 조의금은 안 가질 테니 하다못해 봉투라도 달라고 했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 한다면서 봉투라도 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다. 계속 달라고 해도 들은 척 만 척을 하니, 씁쓸한 생각만 들었다. 대체 그게 뭐라고 고집을 그리 부리는 걸까? 2년이 다 된 지금도 봉투는 못 받고 있다. 누가 왔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 때문에 아버진 알음알음 감사인사도 안 했다고 욕을 먹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은 큰집과 우리 집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닌지 싶다.


할머니의 장례를 하는 동안 주변 장례식장에서 싸움이 난 것을 본 적이 있다. 대체로 누가 잘못을 했느냐 누가 돈을 더 많이 가져야 하냐 또는 재산분배에 관한 싸움이었다. 돈이란 것은 참으로 간사하고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모든 것은 돈이란 것 때문에 시작되니까.


"들어온 조의금에서 남은 돈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옮기는 데 쓸 거야, 그리고 너희 집은 아들이 없으니까. 내가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든 내가 주관할게."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우리 집은 아들이 없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든 자신이 주관한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 뭔 개소리인지. 우리가 아들이 없다고 자신이 주관한다고? 친 자식도 아니고 조카인데? 우리는 뭐 자식도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집은 시집간 자식도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라도 사위가 있는 게 맞지 왜 자기가 나서나? 마치 우리 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아서 기분 나빴다. 하긴 할머니를 보고 빨리 죽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인데. 그까짓 것이라고 못할까?


그러고 보면 정말 돈이란 것은 무엇일까?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싸움 나고 돈 때문에 형제끼리 손절하고ᆢᆢ

참 정말인지 지긋지긋한 단어이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으니까ᆢ. 머리가 아프지만 별수 있나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그래도 가족불화를 야기시키는 건 참을 수 없다.


우리 집은 언제 날개를 피고 언제 활짝 날갯짓을 하면 하늘을 한번 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심히 살 수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참 우리 집은 방해꾼이 많고 날개를 꺾으려는 자들이 많은 거 같다. 그들을 피해서 날갯짓을 한번 활짝 펴고자 한다. 할 수 있겠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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