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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형 Oct 24. 2017

프로그래머, 디벨로퍼로

대한민국 개발자로 산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우리는 유일한 자가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다짐이 없어도 우리를 늦게까지 깨어 있게 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다른 일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것은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 구본형 


어느 여름날 눈을 떠보니 해가 뜨지 않은 고요한 새벽녘이었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기에 좀 더 자기 위해 뒤척였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슬픔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지금 이대로 내 인생이 무의미함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내 삶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엄연히 프로그래머란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새벽에 일어나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로 현재의 직업이 떠오르지 않은 건 일이 전해주는 만족감과 일을 좋아하는 정도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날 이후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정의를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구하게 됐다. 


문득 새벽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프로그래머란 단어를 좋아한다. 용어가 주는 세련된 맛도 있지만 왠지 모를 전문성이 느껴진다. 같은 물건을 사도 겉으로 근사하게 포장된 물건이 가치 있어 보이듯이 나는 개발자도 영어식 표현인 디벨로퍼로 불리는 게 좀 더 우아하게 느껴져서 좋다. 더욱이 영어로 풀어 보면 디벨로퍼는 '발달'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란 뜻이니 내가 추구하는 가치지향적 용어로도 더할 나위 없다. 그렇다. 개발자는 개발하는 사람이다.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을 개발한다. 나는 모호하게 혼용되는 프로그래머(programmer)와 개발자(developer)의 차이를 나만의 방식으로 정의하고 싶었다. 의미를 세워둠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직업적 한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프로그래머는 코딩을 하고 그 일을 업으로 삼는 직업적 개념으로, 디벨로퍼는 직업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개발하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우선, 단지 직업적 의미에서 보는 시각은 밥벌이에 한정된 의미가 강하다. 지금 당장 코딩을 좋아하고 일에 보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떠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일을 그만둔다. 그리고 다시는 고생스러운 이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직업적 사명감이 부족하고, 일이 주는 의미가 밥벌이 이상 되어 주지 못한다.


반면 디벨로퍼는 평생 그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발전시켜 평생의 필살기로 키워 갈 수 있는 의지가 있다. 그들에게 당장 급여가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꿈을 위한 과정이라면 마땅히 고통의 시간을 참고 이겨낼 준비가 돼 있다. 또한 이곳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쏟아붓고 싶은 사람이다. 그들은 결국 회사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고용하는 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평생 고용 보장이라는 약속이 깨어진 사회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불안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를 펼칠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그저 생존만을 위한 삶이 중심이 될 때 우리의 삶은 비참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느 햇살 좋은 날, 문화 예술의 도시 통영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일정상 그곳에서 전혁림 미술관에 들렀다. 나는 평소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었기에 좋은 작품을 보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의무적으로 미술관을 돌았다. 그러곤 일행을 따라 발길 가는 대로 2층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작가와 한평생을 함께한 낡은 도구들을 보는 순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강한 전율에 멈춰 서야만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던지 물감통엔 덕지덕지 물감이 붙어 있었고, 그가 직접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붓들은 휘어지고 낡아 군데군데 수선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몇만 번이나 사용했는지 자연스럽게 작가의 손에 맞게 닳은 도구들은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노령임에도 자기 일에 오랜 열정을 불어넣은 작가의 흔적은 도구 곳곳에 묻어나 후대에까지 그의 정신을 느끼게 한다. 비로소 난 그가 그린 그림 전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는 이 일이 그가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소명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는 결국 일을 통해 스스로를 빛나게 한 사람이다.



그 후로 나는 무슨 일이든 잘하고 싶다면 꾸준히 오래 하자는 교훈을 얻었다. 대충 할 일이면 시작하지 않았고, 유행을 좇아 보기 좋은 일엔 더욱 손이 가지 않는다. 결국 나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게 된다.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평생 이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평생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는지 말이다. 나는 천직은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찾듯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해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당연히 찾기 어렵고 찾은 후에도 키우기 힘들다. 작은 나무가 거목이 되려면 우직함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 지루하고 노역이 필요한 일에 나를 온전히 맡겨둬야 하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디벨로퍼가 추구하는 목표란 '그 일'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 인생 모두를 통째로 그 일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을 들여 숙련되고 나이가 들수록 이치를 깨달아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그 결과, 현재 하고 있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나이를 먹어도 평생에 걸쳐 지속할 수 있는지, 평생 하고 싶은 일인지 지속적으로 자문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여건상 코딩만으로는 평생 이 일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현재 하는 일을 평소 좋아하는 다른 분야와 접목해보기도 하고,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미래에 각광받을 분야를 예측해 적용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IT와 인문학을 접목해 쓰인 이 책도 하나의 결과물이며,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도 데이터 분석 기법을 도입해 의미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결국 평생의 직업을 찾는 일은 지금 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일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전문가는 이 핵심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언어로 해당 분야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문가라 인정받을 것이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50년 동안 매일 같은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그리도 간절히 구했을까?


"전능하사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저에게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지혜가 저에게 명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저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저를 향한 당신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기도를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천직을 찾는 어려움을 그의 기도문을 통해 배운다. 그만큼 천직을 찾는 일은 간절히 구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하니 천직을 천복(天福)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늘이 내려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일이니 그리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또한 나는 이 기도문이 주는 의미를 간절히 구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로 해석한다. 무릇 가장 자기다운 일을 찾아 나설 때의 마음가짐은 이와 같아야 한다고 여긴다. 인생에 대한 진실한 태도는 하늘까지도 감동시키기 마련이다. 나는 끊임없이 갈망하고 구하고 있는가? 천복을 찾기 위해 이 정도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가? 신념을 가지고 열정을 가진 사람의 모습은 언제라도 아름답다.



프로그래머는 자신의 필살기를 개발해 디벨로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흐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한다. 당장의 밥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현 단계를 무시하고 건너뛸 수 없으며, 조금씩 준비하고, 준비를 끝마쳤을 땐 모든 애증을 끊어내듯 단칼에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그 전까지는 균형이 중요하다. 당장에 밥벌이를 책임지는 지금 내 직업과 미래에 가질 직업 간의 중간 지점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조율해가며 준비를 마쳐 미래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위대한 일은 기다림과 숙성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면 돌아가고 때로는 높은 산을 넘어서야 할 수도 있다. 재능이 부족하면 땀과 열정으로 메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힘만 든다면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거라고 여긴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놀이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그 일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할 수 있으리라. 좋아하는 일에 한번은 푹 빠져라! 인생의 주체자로서 한 번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전부를 써보고 가자. 


개발자여, 디벨로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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