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정육점이 서로 경쟁하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신이 한 정육점 주인에게 말했다.
"네 소원을 말해보아라. 무엇이든 들어주마."
정육점 주인이 소원을 빌려고 할 때 신은 이렇게 덧붙였다.
"네 소원은 바로 들어줄 것이지만, 건너편 정육점 주인에게는 네 소원의 두 배를 줄 것이다. 네가 1억을 달라고 하면 너에게 바로 1억을 주겠다. 그와 동시에 건너편 정육점에는 2억을 줄 것이다. 잘 생각해 보고 소원을 말하거라."
정육점 주인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신이시여, 저의 한쪽 눈을 뽑아주세요."
남 잘되는 꼴 못본다고 했던가. 예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내 이웃이 잘되는 것조차 질투하고 배 아파한다. 위 우화와 비슷한 실험을 KBS 프로그램 <6자 회담>에서 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1억을 주겠습니다. 대신 당신이 1억을 받는다면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100억을 받게 됩니다.” 이 가상의 상황을 두고 방송에 참여한 패널 대부분이 1억을 포기하는 것을 택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단순한 경제 논리만 따져보면 1억을 받는 게 이득이겠지만, 많은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더 큰 돈을 받는 것이 싫어 1억을 포기했다. 우리가 포기한 이 1억을 프로그램에서는 ‘미움의 가치’라고 정의했다.
나 또한 마흔이 되고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경쟁 속에서 때론 남보다 나은 내 모습에 우월감을 가졌고, 남보다 못한 모습에 열등감에 빠지곤 했다. 어찌 보면 내 모든 가치판단에 남과의 비교되는 심리가 반영돼 있던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왜 자신의 행복까지 타인의 행복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걸까?
이런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독일에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한다. 정확히는 ‘타인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기뻐하는 심술궃은 마음’이란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두고 인간이 가진 가장 악한 마음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이 갖고 있는 가장 악하고 비열한 측면, 그리고 부정성이 돌출하면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샤덴프로이데’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샤덴프로이데를 권하는 사회다’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입시제도가 경쟁을 심화했다는 내용을 봤고,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경쟁은 학교 폭력, 마녀사냥, 악성 댓글 등이 만연한 사회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현재 마흔 이상인 사람은 이 치열했던 입시와 취업 경쟁을 거쳐온 사람들이다. 그것뿐이겠는가? 사회에 나가서도 겪게 되는 수많은 경쟁들, 때론 견디기 힘들고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일들을 이제는 우리의 아이들이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샤덴프로이데’는 순간적인 만족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 뒤에는 공허함과 자기혐오가 따라온다. 결국, 타인의 불행을 통해 얻은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흔의 나이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상대적 행복'이 아닌 '절대적 행복'이다. 나의 행복이 타인의 상황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흔을 지혜롭게 보내는 가치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 이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위 우화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당신은 어떤 소원을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