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저주
세계에서 11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 이들은 대개 케냐, 볼리비아, 인도네시아 등 가난한 나라에 산다. 이런 오염된 물은 설사 등 많은 질병을 일으킨다. 나아가서 연간 180만 명이나 되는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오염된 물로 인해 생기는 질병(수인성 질병)으로 사망을 하기도 한다.
수인성 질병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집집마다‘태양광 식수 살균 처리법(Solar water disinfection)’으로 물을 처리하여 마시면 질병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방법은 돈도 들지 않고 사용법도 쉽다. 페트병을 깨끗이 씻은 후 오염된 물을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지붕처럼 햇볕이 잘 드는 곳(양철 지붕과 같이 햇볕이 비치면 바닥이 달아오르는 곳이면 더욱 좋음)에 놓는다. 햇볕에 적어도 6시간(구름이 낀 날에는 이틀 동안) 쬐인다. 그다음에는 마시기만 하면 된다.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은 자외선과 태영열이 오염된 물속의 병원균을 죽이기 때문이다. 만일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을 받아먹으면 된다.
그런데 효과가 검증된 이렇게 좋은 방법이 마을에 잘 전파되지 않는 것이다. 이 방법을 전파하는 담당자는 “도대체 이렇게 좋은 방법을 왜 사용하지 않는 거야?” 라며 답답해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소통 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설득을 위한 소통 방법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정교화 가능성 모델(Elaboration Likelihood Model)’을 활용해 보기로 하자.
‘정교화 가능성 모델’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중심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 경로’이다. ‘중심 경로’는 어떤 정보를 접하면 그 내용이 근거가 있는지, 논리적인지 등 아주 꼼꼼히 생각을 한 후 평가를 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반면에 ‘주변 경로’는 상대방의 외모나 설명하는 자료의 겉모양 등을 보고 즉흥적으로 판단을 한다. 메시지 내용보다는 이런 주변 단서만을 보고 별생각 없이 평가를 내린다.
케냐의 한 마을에 ‘와이’ 엄마와 ‘루이’ 엄마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두 엄마 모두 보건소에서 나온 담당자로부터 ‘태양광 식수 살균 처리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렇데 판단을 내린 과정은 둘이 크게 달랐다. 먼저 와이 엄마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그 내용을 분석하고 나서 판단을 한 반면, 루이 엄마는 보건소 담당자의 설명하는 자세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내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재빠르게 평가를 했다.
여기서 와이 엄마는 ‘중심 경로’를, 루이 엄마는 ‘주변 경로’를 선택한 것이다. 그에 따라 두 사람 다 새로운 방법을 거절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경로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개인적인 관련성’과 ‘정보 처리 능력’이 두 가지 요소에 따라 경로를 선택한다. ‘개인적인 관련성’은 정보가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관련되어 있는 정도를 말한다. ‘정보 처리 능력’은 해당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개인적인 관련성’이 높고 ‘정보 처리 능력’이 있으면 ‘중심 경로’를 타고, 둘 중에 하나 또는 둘 다 없으면 ‘주변 경로’를 선택한다.
이제 중심 경로를 선택한 와이 엄마와 주변 경로를 선택한 루이 엄마를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알아보자. 왜 루이 엄마는 ‘중심 경로’를 선택한 걸까?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요염된 물로 설사병에 걸려 죽을 뻔 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한 물을 마실 것인가에 대해 늘 걱정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것이다. 당연히 ‘개인적인 관련성’이 높다. 그녀는 귀가 솔깃해서 설명회에 참석했다. 또한 보건소의 담당자가 설명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 처리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심 경로’를 탔지만 담당자는 이 새로운 방법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와이 엄마가 주변 경로를 선택한 이유를 보면, 자신의 가족은 지금까지 오염된 물을 먹고도 배탈 한번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식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물을 정화하는 새로운 방법은 자신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또한 담당자가 영어를 섞어가면서 설명하는 것을 보니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련성’도 낮고 ‘정보 처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변 경로를 선택해서 판단을 했다.
어떤 경로를 타는지 파악했다면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먼저 중심 경로를 타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을 할까?
중심 경로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전달할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의 자세한 사항을 제공한다. 또한 내용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루이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원리와 어떤 절차로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지를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한다.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루이 엄마는 이런 정보를 보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할 가능성은 한결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중심 경로’를 선택해서 결정한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다. 루이 엄마의 ‘태양광 식수 살균 처리법’으로 오염된 물을 정화해서 우리 가족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은 쉽사리 바뀌지 않고 오래간다.
주변 경로를 타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을 할까?
이들은 단순한 주변 단서들에 의해 설득된다.
메시지 자체보다 설득하는 사람의 선호도, 외모, 화법, 환경 등 주변 단서에 의해 판단을 한다. 전달하는 사람이 싫으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컨대 와이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태양광 식수 살균 처리법’ 내용보다는 설명을 하는 담당자를 잘 선정해야 한다. 와이 엄마가 평소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하고, 담당자의 복장도 그녀가 선호하는 것으로 갖추거나, 말하는 화법도 친근하게 한다면, 와이 엄마는 이것을 도입할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물론 이렇게 ‘주변 경로’를 선택해서 결정한 것은 ‘중심 경로’와 달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정교화 가능성 모델은 소통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첫째, 사람들은 두 가지 경로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를 잘 이해해야 그에 맞는 소통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만들어서 ‘중심 경로’를 통하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의외로 ‘주변 경로’를 통하여 설득되는 경우도 많다. 소통을 할 때 무조건 논리적인 메시지로 설득하려 하지 말고, 외모, 분위기 등 감정적인 요소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맞는 얘기를 하긴 하지만 늘 차가운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비호감’을 갖게 하여 설득력을 낮게 한다.
셋째, 같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경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와이 엄마가 ‘주변 경로’를 통해서 판단을 했지만, 가족들이 오염된 물로 인해 설사로 고생을 하고, 보건소 담당자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을 한다면 경로를 바꿔 ‘중심 경로’를 탈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주변 경로’를 통해서 태도가 바뀐 것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중심 경로’를 선택하도록 소통 방법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 경로’를 선택한 와이 엄마에게 처음부터 ‘중심 경로’를 탈 수 있도록 ‘태양광 식수 살균 처리법’이 그녀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예컨대 고령인 그녀의 친정어머니와 같이 노인들에게는 오염된 물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최고의 효도선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와이 엄마는 친정 엄마를 위해서 기꺼이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을 전달하면서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겠지 생각을 한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왜 그렇지? 하고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바로 지식의 저주이다. 이런 지식의 저주는‘정교화 가능성 모델’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많이 줄어들 것이다.
('무엇이 최고의 리더를 만드는가' & '임팩트 질문법' 저자, 이태복)
참고문헌
Moser S, Mosler HJ: Differences in influence patterns between groups predicting the adoption of a solar disinfection technology for drinking water in Bolivia. Soc Sci Med 2008, 67:497-504.
Petty, R. and J. Cacioppo. (1986), “Communication and Persuasion: Central and Peripheral Routes to Attitude Change,” New York: Springer-Verlag.